배우 금앵

by 김인

"내가 할께."

A는 내 말에 고개를 들더니 말을 못 잇는다. 우리는 둘 다 아이 있는 여자이고 힘들 때 서로의 아이를 돌봐주는 것으로 미사여구 필요없는 친구로 살아왔다. A의 어머니가 갑자기 수술을 받으시며 함께 살던 친정어머니, 구순 넘은 A의 외할머니가 홀로 계시게 되었다. A는 엄마 병간호를 해야 하고 A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살아계셨대도 장모와 있으려 하진 않았겠지만. 남자가 많은 일가인데 하나같이 자신들은 '그런 일' 모른다고 해서 A의 어머니가 우셨다고 한다. 나는 전에 A에게 진 품빚을 언급하며 이걸로 갚는 셈 하자고 했다. 둘다 웃었고 필요한 얘길 들었다. 챙겨야 할 약, 노인의 습성과 주의점, 집안 구조와 냉장고 등. 나는 훌쩍 자라준 큰아이에게 작은 아이를 부탁하고 슈트케이스를 밀며 의왕 어디메에 있는 단독주택 문을 열었다.


노인은 말이 없었다. 들어갈 때 웃는지 찡그리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표정을 일으키며 내게 고개를 숙인 것이 전부였다. 식사하세요,말씀드리면 집 어디에선가 짧게 자른 은발 퍼머를 뚜껑처럼 쓴 몸이 흘러오듯 다가왔다. 움직일 때마다 아이구아이구하는 할머니들을 보다가 조용한 분을 보니 사람과 사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할머니는 조굴조굴한 주름을 움직여가며 입매만 놀려 진지를 잡수셨다. 저녁엔 뭐 드시고 싶으세요,하면 아무거나,라는 표정으로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며 할머니의 습관을 알게 되었다.


아침이면 경대를 열어 화장을 한다. 진한 화장은 아니지만 눈썹을 꼭 그리고 분을 정성껏 누른다. 화장을 하고 나면 안경을 끼시고 사진이 들어간 책을 펴 한장한장 넘기며 정독을 한다. 점심 즈음엔 집 근처를 산책한다. 함께 걷는 내가 곁에서 떠들든 말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동네를 빠져나가 구불구불한 나대지 산길을 걷고 들어온다. 점심을 잡수시고 낮잠을 주무시는데, 그 전에 타월에 더운 물을 적셔 화장을 정성껏 지운다. 화장을 지우고 나면 꼭 문갑에서 천을 꺼내 얼굴에 비비고는 마당으로 나가 천을 털어 돌돌 말아 다시 보관한다. 낮잠을 주무실 땐 집 전체가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하다. 오후가 되면 부스럭부스럭 일어나셔서 시집을 베끼시고 젖은 걸레와 마른 걸레로 방을 닦으신다. 저녁을 먹고 나면 해가 떨어지기 전 마당 한켠에 신문지를 펴고 앉으셔서 고구마줄기를 손질하거나 쪽파를 다듬으셨다. 집 뒤켠 큰 화분들엔 모조리 파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이 할머니를 좋아하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노인은 인격의 거리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조용한 호감을 나누며 다섯밤을 지냈다. A의 어머니 수술이 잘 끝났고 내일 점심 전에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일이면 가게 되었네요."

저녁상 앞에서 할머니가 고개를 드셨다. 내 이마를 향하는 눈은 웃는 듯 하고 얼굴에 애잔한 미소가 돈다.

"집에 볕이 잘 들고 조용하셔서 저도 휴가 온 기분이었어요. 집엔 아들만 둘이라 정신이 없거든요."

"할 말이 없어요."

할머니 음성이 나직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사람은 없다던데요."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했을까. 건방지다고 느끼셨겠지, 당황해 사과하려는데 할머니 입술이 열렸다.

"우리 손녀랑은 어떻게 친해요?"

"힘든 직장에서 만났어요. 퇴사하고, 그만두고 친해졌어요. 손녀분이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그래요......"


저녁 설거지를 하는데 할머니가 뒤에 앉아 계셨다. 손을 닦고 돌아보자 산책을 가자신다. 우리는 집 근처 공터로 나가 앉아 밤을 느끼며 얘기를 했다. 드문드문, 소금쟁이가 호수에 발자욱을 띄우듯 할머니의 작은 음성이 조심조심 이어졌다. 시처럼 짧은 말로 의미가 담긴 말씀을 하셨다. '큰아버지가 밤에 방에... 집을 나와... 창극 딸려갔다가 아미씨 엄마가... 연극이... 색시를 했었는데 밥먹고 살았어요...' 어린 나이에 몹쓸 친족 때문에 가출을 했다가 동네 논다니 따라 창극단에 들어가서 눈칫밥을 먹었다고 한다. 창극단이 남자 배우 위주여서 여자들은 고생이 심했는데, 과거엔 대접받았던 나이든 여배우 아미가 여자애 몇을 데리고 도망해서 극단을 차렸다고 한다. 아미 단장 고향이 부산이었는데 나중에 전쟁 때문에 부산에 피난민이 몰려들며 극단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극단은 계속 여자로만 꾸렸다고, 그때는 그런 여자 극단이 많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선이 곱다고 계속 색시 역할을 맡았는데, 서방 역할을 하는 친구가 어깨를 감싸주는 장면에서 늘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고 하셨다. 극단은 하루 네다섯번 공연을 열 정도로 잘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요?"

"전쟁이 길었지.....금지(금덩이)가 몇개씩." 아미 단장 집에 금괴가 쌓여갔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픈 사랑을 했다. 피난민 중에 의전 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거기 뒷바라지한다고 서울로 함께 도망했다고 한다. 서울 여인숙에 와서 짐을 여는데 저고리 소매에 금지가 두 개나 있어서 아미 단장에게 고마웠다고 하셨다. 의전생은 의사가 되었지만 할머니와 헤어졌다. '정도 금따라 없어졌다'신다. 그 뒤로 공장에 가서 일을 했고 무난한 사람 만나 고맙게 살다가 남편 먼저 갔다고 하셨다. '애기 둘은 가슴에 묻고'라며 목소리에 그늘이 졌다. 한 명은 아파서 한 명은 태중에 있을 때 잃었다신다.

"화장을 하시는 게 그럼, 극단하시던 기억으로."

"하던 거라......"

"화장 지우실 때 천으로 지우시는 걸 본 것 같아요."

"비단이요. 얼굴에 비단을 가까이 하면 복숭아처럼 가피가 깨끗해져요."

"아 비단이었군요."

설명이 필요없었다. 할머니는 자신을 색시로 대우하면서 세월을 감당해 오셨다.


우리는 잠시 앞을 보았다. 나는 까만 공터를 보며 할머니의 우묵한 과거를 상상했다. 할머니도 그 시절을 보시는 것이 손에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죽으니까, 하고 싶은 것 다 해봐요."

"...할머니는 뭐 하시고 싶으세요?"

"... 머리를 올리고 싶어요. 길러야......"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내려 짧은 은발 모서리가 톡톡 도드라져 보였다.

"기르셔서 쪽을 지시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길러서... 가채를 올려 머리를 크게 한번......"

"그러세요.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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