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에게

K의 고독에 부쳐

by 김인

K는 흥미로운 인간이다. 속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카리스마에 가깝지 음험하거나 불안정한 쪽은 아니다.

진솔함, 인간애. 누구도 십년이 넘도록 가장을 하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꼿꼿한 자세. 깡마른 몸에 검은색 위주의 소위 상복 패션.

첫인상은 까만 잉크 같고 방어벽이 느껴지는데 얘기하면 어느새 공원에서 하늘을 지고 앉은 기분이 된다.

이렇게 잘 웃고 재치있는 농담을 하는 사람, 소탈하고 따뜻한 여성이라니.

반짝이는 사람인데 관계를 트기 전엔 까만 동굴 안에 들어가 있는 동물일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당연히 인망이 두텁다. 앞에 있는 사람을 섬세하게 배려하고 스치는 사람에게도 예의를 들인다.

만나고 헤어질 때 집에서 기다리는 나의 아이들 생각해서 케익을 사 들려준다거나,

생일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태어나줘서 고맙다'며 축하인사를 주는 성의가 한결같다.

부담스럽게 이것저것 내밀지 않고 받는 사람의 입장부터 고려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가 내미는 것은 선물보다 정성이 들어맞는 표현이다.

작년 내 생일에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한정판 도록을 선물했고

올해 생일엔 선물없이 진심 담긴 축하 메세지를 주어서 더욱 기뻤다.

그녀는 작년 선물과 내가 느꼈을 약간의 부담감을 기억하고 올해는 담백한 인사만 내밀었음에 틀림없다.


신중하고, 관계에서 적절한 선을 유연하게 조절하며 사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러한 능력을 뭐라 표현해야 할 지 말을 잃는다.

긴장하면서 산다기에는 관리에 따를법한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애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저 따뜻한 사람이라기에는 거리가 느껴지는 엄정함이 분명하다.

따뜻한 물이 담긴 너그럽고 큰 욕조에 있는 것 같지만

그녀가 기만적인 행태를 향해 차분히 항의를 하는 모습에서 서늘한 칼을 느낀다.

셋이 어울리던 관계에서 한 사람이 질시와 모함을 드러내자

그녀는 의아하다면서 중단시켰고 그가 부정하며 화를 내자 다시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싹둑 잘라버리는 모습은 그녀의 전매특허인데 무섭다기보다 대단하다.


K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강권한 적이 있다.

사내소식지에 에세이가 펑크나서 그녀가 때워 써주었는데 모두가 놀랄 정도로 정서가 생생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봄날에 느끼는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뻔하고 예쁘장한 칸에 그녀는 슬픔이 애완으로 담긴 문장을 담아주었다.

몇사람 읽지 않은 채 사라지기엔 아까운 글이었고 귀한 재능의 증거였다.

내 야단법석에 그녀는 끄덕끄덕하며 웃더니 몇주 지나 고백을 들려주었다.


자신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했다. 구슬프고 무뚝뚝한 사정을 여기 적을 수는 없다.

다만 가족 간의 정이나 인간의 애정이 무엇인지 보지도 믿지도 못할 환경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존재를 부정하며 아들 낳겠다고 밖으로 돌고 아침부터 밤까지 돈에 매였고,

어머니는 그녀를 뼛속까지 착취했으며 영원한 피해자로 자청해 남아서 맏딸을 괴롭히고 있다.

여동생, 사촌, 인척들 모두 내 표현으로는 '다종다양한 쓰레기'이다.


"난 혼자 살아왔어요. 그래서 알아요. 혼자 살 수 있다는 걸."


"할 말이 없네요. 힘들었겠어요......"


"그 말이요, 힘들었겠다는 말.

혼자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더라구요. 힘들었겠다, 얘기할 사람이 꼭 필요해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눠 지는 것도 필수구요. 공감을 나누는 시간이 없으면 시들었어요."


"아......"


"초등학교 때예요. 화창한 날, 사방에 봄이 타던 날이죠. 그날은 진분홍 꽃도 촌스러워보이지가 않았어요.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들어갔는데, 세간이 엉망으로 부서져 내려있고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침에 읽던 빨강머리앤 책은 찢긴 채 수채구멍에 박혀 있고 장농은 옆구리가 내려앉았고 문이 너덜너덜해요.

아, 엄마가 부부싸움하고 동생 데리고 집 나갔구나."


"동생하고 한 살 차이라면서요. 왜 K는 안 데리고 가요? 아버지한테 맞아 죽으라는 거야?"


"엄마는 손가는 동생과 달리 제가 혼자 공부하고 밥 챙겨 먹을 수 있으니까 데리고 갈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학교를 다녀야한다고 했죠. 저는 이혼은 않기 위한 인질에 불과했어요. 어른들이 제 마음 상상하셨을까요.

엄마를 비난하지 않아요. 엄마 입장에선 제게 나눠줄 여력이 없었을 거예요. 제 현실이 그랬어요.

여튼 그날 집청소를 하고 너덜거리는 장롱문도 신문지 괴어서 한켠에 세워뒀어요.

걸레 빨아서 마루를 닦았는데, 다 닦고 매끈해진 나뭇결 위로 빨간 노을이 비치더라구요.

그날이 내가 태어난 날 같아요."


"어떤,"


"나는 마루를 닦을 수는 있는 거예요. 우연히 이런 집에 태어났지만 내가 마루를 닦고 노을을 즐길 수는 있구나.

내 운을 최대한 성실히 살아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나보다 못한 처지도 좋은 처지도 많지만 상관말자.

대학 갔더니 자기 인생의 목표를 적으라잖아요. 대충 적어냈지만 제 마음은 아궁이가 보였어요.

잿더미만 보여도 다가가 휘저으면 까만 재 사이로 빨간 불씨가 올라오는 모습이요. 나도 따뜻해지고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가는 거요."


"모여들었다가 간다?"


"처음엔 친구들에게 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부담스러워하더라구요. 전 극단적인 환경이었으니까.

제가 친구들 입장이었어도 낯설고 두려워졌을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남 얘길 들으려 했어요.

그러다보니 내 피해의식을 넘어서게 되었고, 행운은 몰라도 불행은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친구가 늘어나면서 또 느껴지더라구요. 모두 시절인연이라는 것. 나 자신과도 언젠간, 사실 언제든 헤어지잖아요.

나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사람, 자기 시체를 상상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이별이 싫고 사랑에 고팠기 때문에,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그걸 꼭 극복하고 싶었는 지도 몰라요."


"해내셨네요. K가 극복한 걸로 느껴져요."


"어느 정도는요.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요."


"세상을 사랑한다, 설명해주세요."


"아버지는 돈과 아들, 엄마는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동생도 인척들도 각자 뭔가에 매이는데

제 판단으로는 그게 자신들의 파편에 불과해 보였어요. 그런 욕구가 염치없어 보였구요.

나는 동전 하나 내 걸로 가져본 적이 없고 사랑받은 기억도 없는데, 아버지는 저렇게 돈돈 하고 엄마는 자기한테 따뜻한 말 해달라면서 애정을 요구한단 말이죠.

사실 제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생명의 원래값 아닌가요. 당연한 것은 없다고 손가락을 보며 생각했죠.

언젠가 엄마가 부부싸움 직후에 저더러 아빠에게 가서 엄마 괴롭히지 말라고 화를 내라고 시킨 일이 있어요.

그때 알았죠. 이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뺏긴 것 되찾아오려는 양 채근하고 동동 구르는구나."


"세상에."


"좋은 단어 계속 말씀주시네요. 세상.

전 어느새 주변을 불신하게 되었고 제 감각에 충실하게 되었어요. 기댈 게 그것 뿐이니까요.

그리고 절실하게 배웠어요.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 말씀이죠.

진실을 보면 외로워도 견딜만 해졌고 좀 쉰 후엔 걸레든 부젓가락이든 쥐고 움직일 힘이 났어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면서 저는 제 운을 놓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어요.

가족을 벗어나 믿을만한 사람들도 만났구요. 이렇게 공감도 받구요. 그것에 무척 감사해요."


"글로 써봐요."


"못해요. 고통스러워요."


"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아니예요. 칭찬이라 너무 좋았어요. 기억하려구요."


"본인이, 만약 사랑받고 풍족하게 컸다면 어땠을까. 애석하지 않았어요?"


"해봤죠. 아마 지금보다 부드럽고 즐거운 사람으로 자라고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지금의 저보다 덜 분투하고 덜 노력해도 되었겠죠. 하지만 지금밖에 없으니까요."


"네."


"외로운 사람은 그래요. 내 곁엔 내가 있어줘야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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