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이 쓰여

행복한 사람

by 김인

"신경이 쓰여."

M은 커피를 들이키며 한숨을 쉰다. 키가 커서 더 길고 가늘게 보이는 M의 실루엣이 옆으로 조금 흔들린다.

똑같은 커피를 앞에 두고 앉은 나는 난감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M이 걸친 고상한 화장과 까만색 반팔 니트 원피스는 내가 둘러쓴 야구모자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 차림에 대조를 이룬다. 각자의 모습이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겠다는 걸 보여준다. 내빼고 싶다. 아이 하교할 시간이라 곧 가봐야 한다고 말했고 시계를 보며 눈치를 주었건만, M은 내게 십분이라도 좋으니 같이 있어달라고 했다. 허전한 날이 있잖아. 그렇지. 고분고분 따라와 수굿이 커피를 주문했지만 내 입안은 깔깔하다. 불편한 마음보다는 불쾌한 기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냉깔스러운 M의 태도 때문일 게다. 커피 주문하며 내가 '같은 것 할께요.'했더니 M은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두잔이예요.'라고 쌀쌀맞게 고쳐 말했다.


우리는 A가 일하는 사무실에 들렀다가 허탕치고 근처 까페에 들어온 참이다. A와 나는 오랜 친구이고 M까지 같은 고교 동창이다. M은 작년부터 친하지도 않던 A 안부를 묻더니 운전을 하고 찾아왔다. 미리 약속을 정한거냐, 나도 가야하냐는 물음에 M은 대꾸없이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는 앞만 보고 주행했다. 아쉽거나 민망할 때 뚝 자르고 빠지는 M의 침묵은 여전하구나. 날씨만으로도 화창한 오후를 망치는 것 같아 한심스러운 심정이 되었지만, 녹음이 짙어가는 가로수를 관람하며 따라왔다. A에게는 M과 둘이 만나는 것보다는 나까지 셋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M 역시 A와 단둘이 만난 적 없는 사이라서 날 아교삼아 데려가는 것이리라.

A는 사무실에 없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시민단체 활동가라 자리에 없기 마련인데, M은 A의 동료에게 새침하게 묻고 미간에 짜증을 담은 얼굴로 명함을 맡겼다.


"집회 중이면 나도 가도 되잖아. 운전하면 금방이구. 위치를 왜 말해주지 않을까? 안전 면에서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M이 거듭 한숨을 쉬며 까페 소파에 엉덩이를 깊이 묻는다. 피곤한 기색이다.

"들었잖아. 유가족이랑 있다고. 혹시 오체투지면 이동할텐데, 방해가 될 수도 있고."

"내가 도와줄텐데."

"......."

무슨 도움,하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다물었다. 십분. 나도 M처럼 못 들은 척 하고 시간을 때우면 그만이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A와 M의 삶은 달랐다. 아니, M이 A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공공연히 끄집어 올리던 장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개입에 가까운 압박을 하며 M이 A와 관계를 원하는 모양새가 낯설다. M이 A를 좋아한 적이 있었나. 사실 둘은 고교에 이어 대학 동창이다. M이 법학과에 진학할 때 A는 철학과에 진학했다. M이 고시 공부를 한다면서 고시생과 연애에 열을 올릴 때, A는 미전향 장기수의 엄격하고 단정한 생활방식에 대해 글을 써서 학보사에 냈다. 빼어난 미인인 M이 일과 사랑 중 자신은 사랑을 택했다는 소리를 하며 화려한 상대과 결혼을 하고 아이낳고 사는 동안, A는 시민단체에서 만난 활동가와 결혼해 아이없이 살다가 몇년 전 이혼했다. 아버지 유산으로 강남에 빌딩을 산 M은 법대 동문인 남편에게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주는 등 스스로를 번영의 아이콘으로 과시해왔다. SNS에서 인플루언서도 되고 선망을 샀다. 다만 A의 이혼에 대해 M은 경멸스런 어조로 동정한 일이 있다. M이 남일에 대해 걱정을 바른 우월감을 불고 다닌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A의 이혼에 대한 M의 태도는 염려치고는 현학적이고 공감이 없이 차분하고 세세해서 메스꺼웠다. 몇년전 그때 이후 나는 남의 인격과 인생을 구경하듯 대상화하는 M을 피해왔으니, 오늘 M은 A뿐만 아니라 내 삶도 비집고 들어온 셈이다. 고개를 드는데 M이 작은 파우치를 꺼내어 들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화장을 고치려는 것이겠지. 난 심술이 나서 입을 연다.


"화장실 가기 전에 몇마디 하고 가자. 난 이제 일어나야 해서."

"뭐가 그렇게 바빠? 내가 데려다줄께."

"바쁘지. 애엄마인데."

"너도 참. 사업할 생각 없어?"

"전혀. A를 꼭 오늘 봐야 할 용건이 있었어?"

"그냥."

"음, 조금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 일방적이야'는 소리는 눈에 담아 건넨다. M의 크고 쌍꺼풀진 눈이 날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꾸한다.

"시민단체잖아. 내가 후원할 수도 있고."

"이체하면 그만이잖아. A가 친구들한테 후원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A는 조용히, 부지런히 산다.

M는 몇초쯤 허공을 보다 뇌까린다.

"신경이 쓰여."

"......"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 나이들었나 봐. 향수병일까? 우리 고등학교 때 A가 은근히 인기 있었잖아."

"카리스마가 있지. 지금도 그렇고."

"어떻게 그러고 살까."

"특권을 선택하지 않는 것 같아." 의외의 말이 내 입에서 굴러나온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

"단단하지." 진부한 말로 바꿔본다. M은 내가 대화하고 싶은 상대가 아니다.

"대단하지." M의 고개가 아래를 향하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당황스럽다.

"그래서 찾아온 거야? 괜찮아, 우리 나이도 얼큰하게 들었고 또 시간내기 어렵잖아. 편하게 얘기하고 가자."

"신경이 쓰여. 그게 다야." M의 목소리가 가늘다.

"그래서 확인하러 왔어?"

내 힐난조에 M의 고개가 또 수그러진다. 얘는 안전한 말만 하는 애였지, 나는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며 하고싶은 말을 한다.

"A를 선망하는 애들이 있었어. 후배가 따라다닌 적도 있고. 너는, 선망은 아닐 거고. 호기심일까."

"그런 지도 모르겠어.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져서 그런가 봐."

"A는 네가 가진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여전히 매섭구나."

"나야 여전히 못됐지."

내가 웃자 M도 웃는다. 인사를 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넓은 까페를 걸어나오며 여긴 천정이 높다는 생각을 했다. 개방감. 쾌적. 여유. 많은 조명이 높이 달려 온화한 빛을 뿌려주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분무 음악이 흘러 깔리고 있다. 출입문으로 다가가자 유리문 위로 커피색을 입힌 듯 진한 갈색의 나무 가구에 M이 앉아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비친다. 아까 A가 일하던 좁고 낡은 사무실, 사람도 없는데 A4용지로 혼잡하던 책상이 기억났다. M은 A의 가난과 명예를 탐하는 것일까. 아니다. M은 A를 부러워하기엔 너무 부자고 부자인 걸 원했고 공작새처럼 사는 것이 편한 사람이다. 보장된 카드만 집어든 M이 A와 무슨 얘길 하고 싶었을까. 여고생이 중년 여성이 되기까지 충분히 시간을 겪었다. 세월은 각자가 선택한 가치의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M의 선택이 A와 겹친 적이 없다. 심심해서 생각나고, 생각하다보니 신경이 쓰여서 건드려 본 것일까. M은 내키는 어느 곳이나 휘저으며 살아왔으니까. 프랑스에서 임신한 아들은 미국에서 낳아 거기 국적인데 요즘은 미국에도 한국 사람 많아 지겹다고 했다. 기득권. 안전에서 나오는 여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대저택이 있으면 모험은 여행처럼 부담이 없어진다. 아우성치는 머리를 감당했더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도착할 때쯤엔 한 것도 없이 피곤했다. 엄마 늦게 왔다며 입술이 댓발 나온 아이를 달래 저녁으로 라면을 끓이는데 A가 전화를 주었다.


"미안! 전화했었네? 잠깐 꺼놨었어."

"바빴지?"

"아니야. 웬일로 기자들이 와서 어머님이 인터뷰하셨거든. 그럴 때 진동벨 울리면 촬영 깨잖아. 아, 보도가 얼마나 나갈까 모르겠어. 몇분 못 나가겠지? 취재 요청 그렇게 보내도 답변 없더니, 아 썅."

"방송사 어디야? 인터넷 볼께."

"근데 M이 너랑 왔었어? 사무실에 명함을 주고 갔다고 연락왔어."

"아, 친구 왔다고 그러디?"

"아니. 친구는 명함 안 주지."


아이의 작고 동그란 검은 머리가 라면 공기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매캐한 라면을 다 먹을 때쯤 진실이 남았다. A는 훌륭하기에 앞서 행복한 사람이다. M은 자신이 누리는 것과 다른 종류의 행복에 신경이 쓰였는 지도 모르겠다. 안심이 된다. M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A의 행복은 구경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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