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각 오후 2시 15분 전, 그러니까 점심 먹은 지 약 한 시간가량 되어간다는 거지요.
오늘따라 기본반찬에 이어 가스불을 두 번이나 켰답니다. 도시락을 싸야 하니까요. 먼저 콩나물 국은 나름 신경 쓰느라고 쌀뜨물에다 다시마 몇 조각 넣어 육수를 만들다가 멸치가루도 한 스푼 정도 넣었지요. 거기에다 빨간 고추 하나를 나름 세밀하게 썰어 넣고 보니 눈으로도 먹을만했어요.
그렇게 싼 도시락은 지금 뚜껑도 열지 않은 채 그냥 있습니다. 점심을 먹지 않았느냐고요? 아주 맛나게 먹었지요. 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같이 구수한 된장에다 정겨운 이야기를 양념처럼 섞어가면서 말입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자리인데요.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다 보니 걷기가 불편한 어르신들께서 대부분 오시지 않아 밥이 많데요. 정이 담뿍 담긴 뚝배기밥을 정신없이 퍼먹고는 설거지를 마치고서 다시 돌아온 안내소입니다.
그런데요. 겨울비가 소리도 없이 조용조용 내리니 고요한 마을 뒷산으로 걸친 운무가 마치 그림 같지 뭐예요? 그림인가 하고 보면 뭐랄까? 감나무 잔가지의 빗물이보석처럼 매달려 있다가 하나 둘 떨어지고 있고요. 구름도 아주 조금씩 움직인답니다.
예서제서 내 얘기도 해달라 조잘대는 것 같으니 그걸 보는 재미만도 신이 나서 굳이 커피 향을 따로 마실 필요가 없어요. 살아있는 그림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 동안 멍 때리다가 도저히 혼자 보고 말기에는 아까운 분위기라 급히 사진 몇 컷 찍고 주저리 써 내려간답니다.
근래 하기 좋은 말로 세상사 괴로울 때 떠나라 하지요. 사실배고픔만 아니면 누려라 하면서 내세우는 게 바로 일과 관계와 근심에서 벗어나 가만히 주시하면서 치유 내지는 위로를 받으라는 의미로 '멍 때리기'라는 말이 있지 않나요?
전 지금 안내소안 창문 앞에다 의자를 바싹 당겨서 앉아 그림 같은 집과 소나무와 감나무의 작은 물방울을 쳐다보면서 지금 멍 때리는 중입니다. 어느새 처음 눈이 갔던 구름은 오른쪽 낮은 능선 쪽으로 빠져나가고 왼쪽에서 새 바람에 실려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제게 눈인사를 건네네요.
토요일 오후, 이 고요가 얼마간 지속될 것 같나요? 멀리서 가까이서 직장을 다니거나 혹은 자기 일을 하다가 휴일을 맞아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리모컨을 쥐고 가족끼리 채널고정을 향한 기싸움 하다 누군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할지도 몰라요.
" 우리 바람 쐬러 가자, 일단 차를 몰고 나서보는 거야, 그러다가 우산 쓰고 걷는 거지. 어디 먹을만한 음식을 파는 식당 있음 거기서 밥 한 끼 해결하고 오는 거 어때?"
그렇게 엉거주춤 집을 나설 부부나 혹은 연인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다 이렇게 고요한 마을을 만나게 되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거예요. 예스런 초가집과 기와집이 도란도란 대화 나누는 것 같고 저기 소나무 아래 서재로 꾸며놓은 집에 가끔 들러서 책을 읽고 시를 짓는 시인이 혹 와 있을까 궁금하다든지, 그 옆으로 진흙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서당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해설사 활동을 위해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선 제가 비 맞을 각오를 하고서 안내소를 나서야겠지요.
멍 때리기는 짧아서 더 아쉬운 마음이겠지만 구경 오신 손님들에게 뭔가 재미난 이야기를 몇 마디 건네야겠기에 저 그림 같은 마을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꼴에 분위기 잡는다고 켠 피아노곡은 그냥 흘러나오게 두고 순간의 기쁨을 놓치기 싫어 정신없이 써 내려간 안^멍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