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야산 머리가 희끗희끗 보인다. 그렇거나 말거나 정오가 가까워오니 성밖숲에는 사람들이 애법 있다. 이파리 하나 없이 서 있는데도 왕버드나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그림 같다.
해가 저물도록 걸을 틈이 없어 만보기가 울기 직전이던 그날은 마침 미사가 없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무사 귀택 해도 될 법했지만 갈등이 생겼다. 비록 겨울비가 촉촉이 내려 흙바닥이 젖어 있을 테지만 수백 년 된 아름드리 왕버들 풍채가 희뿌옇게 보이기 시작하고 아래에서 비춰주는 불빛에 의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보이는 잔가지들의 멋스러운 모습에 그만 속도를 늦추던 차를 세워 버렸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좀 넘었는데 벌써 어둑해서 사람이 별로 없다. 어둠을 뚫고 간간 보이는 불빛을 길잡이 삼아 한 바퀴는 쉽게 돌았다. 하지만 만보를 채우려면 최소한 두 바퀴는 더 돌아 야 하는데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더 걸을까 말까?'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사람 아닌 물체의 흔들림을 이천변에서 보아 버렸다. 밤에도몸채가 긴 재두루미들이 떼를 지어서있는 그림자를 보며 뜨악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성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검은 물살이 퍼덕이다 수면아래로 다시들어간다. 처음에는 큰 물고기들이 장난치며 노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다음은 두 곳에서 물살이 펄떡 뛰었다.
그제야 걷던 걸음을 멈추고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림자와 뒤엉켜서 애법 큰 물살이 움직이는데 물고기보다 커 보였다. '뭐야? 저게 뭐지?'마음이 갑자기 싸했다. 퍼덕대는 그 물살 속은 생사가 달린 물고기들의 마지막 발악이요, 수달이 먹이사냥 중인 바로 그 순간 포착이었던 것이다.
먹이사슬 과정의 실전 현장이었다.약육강식, 즉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하필이면 천연기념물인 수달의 밤 사냥을 마주치게 된 그날 밤 나는 갑자기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다른 종족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 생태계의 질서를 마치 처음 대하듯 멈칫했었다.
우리 사람들은 어떤가? 그날이 생각나서 또다시 걸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멈춰 서서 왕버드나무 밑둥치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며 보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가 수백 년 동안 어떻게 삶을 이어왔을까? 문득 궁금했다. 거무티티한 나무껍질은 베베 꼬이다 쩍쩍 갈라져 있어도 점점 가늘어지는 가지들은 서로 포개어 있지 않고 방향을 달리 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이다
비록 한자리서 움직이지 못한 채로도 한세월을 너끈히 살아가는 나무가 주는 참 지혜를닮아갈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