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휴일 아침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할 뻔했다. 하지만 전날 잡힌 약속이 있어 나들이할 생각으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마냥 신이 나서 우산을 쓴 채 머위와 부추모종을 했다.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마친 뒤에 막 동네를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약속을 잡은 마을 형님으로부터 다른 일이 생겼으니 만남을 취소하자는 전화가 걸려 온다.
차는 벌써 출발한 뒤이고 혼자서의 볼일도 있었기에 그냥 달렸다.혹시나 하며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보았으나 나와 놀자고 급히 받은 전화에 올사람은 없었다.한마디로 나 홀로 외출이 되어버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도착한지하상가는 막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연세가 고만고만해 보이는 분들로 대부분 동행이 있었다. 얼결에 가지는 여유시간이라 느릿느릿 걷자니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는 옷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몰래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다음 눈가는 대로 집어서 색상과 디자인을 보고 몸에 맞는지 입어보았다. 그렇게 원피스와 바지에다 스웨터까지 입어보았으나 어떤 건 안 어울렸고 다른 건 작거나 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르고 입다 보니 작은 가게 안에서의 움직임이 생각이상으로 많아져서 나중엔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소득도 없이 시간은 흘러가는데 배가 고파오고 점점 지쳐갔다. 그제야 애초에 하고자 했던 볼일을 해결한 뒤에 늦은 점심을 혼자 먹었다. 그런데 여전히 속은 허했다. 그다음에 뭐 하지?하면서 가까이있는 성당을 가려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오전에 만나지 못한 형님으로부터 볼일이 빨리 끝났다며 전화가 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나 차 한잔을 한 후 형님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그칠 듯하던 비가 추적대고 있었다. 할 수없이 또다시 지하상가로 갔다.
진짜 이번에는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냥 걷기나 할 생각이었다. 지하상가를 위로 아래로 옆으로 돌던 중 옷걸이에 걸려 있는 블라우스 한 장이 눈에 훅 들어왔다. '카드 안됨, 착복도 안됨' 그러나 이전 가게보다 가격은 더 저렴했다. 천도 나름 괜찮아 보이고 디자인마저 약간 특이했다. 사이즈만 맞으면 된다 싶어 옷 위에다 재느라 좀은 불편했지만 충분할 것 같았다.
'사이즈가 작아요, 환불 안됩니다.'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야 주인은 건네주었다. 가격대도 부담이 적지만 디자인과 색상이 무난해서 하나만 걸쳐도 외출복이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덩달이 한동안 지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만약 비 온다고 나들이를 포기하고 종일 집에 있었더라면 무엇으로 이 기분을 맛보았을까? 처음 계획대로 밀다 보니 마을 형님과의 만남에다 옷과 걷기 운동까지 하게 된 한마디로 일타 상피를 얻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