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너머
직선으로 재면 이십 리는 될까? 태어나서 열여섯이 될 때까지 살았던 친정동네는 집 뒤 당산에 올라 서북쪽으로 팔 펼치면 닿을 듯하다.
친정동네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져 있기에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마치 소쿠리 같다.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 밀양에서 식솔과 함께 박가 성을 가진 분께서 피난을 와 터를 잡았다고 했다. 그 선조 할아버지의 후손 중에 태어난 나는 못생기고 골골하면서도 마음은 세상 다 가진 듯 우쭐대던 꼬마아가씨였다.
그런 중에도 봄 아지랑이와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둥둥 떠다니는 구름 따라 마음이 부풀었다. 높게만 느껴지는 저 산 너머는 어떻게 생겼을까? 물이 철철 흐르는 시내가 있을까? 그 동네 아이들은 무얼 하며 놀까? 어쩌다 언덕에 올라서 보면 또 다른 산이 가려져 있어 또다시 상상 속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아주 가끔 마을을 벗어날 때도 있었다. 아버지 자전거 앞에 타고 아랫마을 공소에 가거나 반대방향인 당 고개를 넘어 외가를 가기도 했다. 아랫마을 앞으로는 큰 저수지가 있어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거나 수영하기를 즐겼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가끔은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듣곤 했다. 외가 마을은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야 보이는 가야산을 마주하고 제법 넓은 들과 신작로길 가로수를 세어가며 먼지 폴폴 날리던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다가 몇 번 쉬다 보면 닿았다.
외갓집에는 예쁜 이모들이 많았다. 종이모들까지 합치면 두 손으로도 모자랐다. 함께 있을 때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신 외삼촌을 합친 아재비는 적다. 남동생과 사촌들로 가득 찬 우리 집과는 많이 달랐다. 덕분에 외가에서 실컷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서도 생각이 참 많았다.
해가 바뀔 무렵 새해맞이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야 한다는 속설 따라 눈꺼풀이 무거웠다. 새해 첫 세배는 동구 밖 큰집 할아버지 할머니께 드렸다. 그 길은 춥고 어두워서 호롱불을 들고 갈 때는 싫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한결 밝아진 데다 떡국에다 세뱃돈까지 받았기에 신나게 올 수 있었다. 온 동네가 강정하기에 바빴고 그보다 먼저 마을에 진입한 뻥 아저씨가 일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온 동네는 고소함으로 가득했다.
정월 대보름이 되기 전까지는 날마다 집집 마당에서 윷놀이가 이어졌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서 놀다 보면 세뱃돈이 나오고 가래떡이 나오고 곶감과 강정이 들어왔다. 심지어는 달달한 엿과 잘 숙성된 고염단지도 나왔다. 겨울 내내 이어지던 윷놀이가 시들할 무렵이면 동내 아재비들 판이 커져서 귀한 씨암탉까지 밤새 가마솥에서 삶기기도 해 가끔은 어른들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구러 마당가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기 시작하면 연날리기와 자치기와 오징어게임이 집안보다는 더 넓은 마을 큰 마당에서 날마다 이어졌다. 그럴 때면 어쩌다 짝 맞추기로 끼워져 놀아도 흙투성이가 되어 밤새 아파서 낑낑대어도 눈만 뜨면 또다시 달려간 그곳엔 항상 아이들이 북적였고 어른들은 구경하느라 곰방대를 들고 서성였다.
내 유년의 그곳에서 산줄기 따라 몇 봉우리를 넘어 고려 이전부터 기우제를 지냈다는 당산 아래로 시집와서 33년째 살고 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가 뜨고 질 것 같았던 상삼마을 친정동네에도 시끌벅적 새 바람이 불어온 것은 전봇대가 세워지기 시작하고부터였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가 뜨고 질 것 같았던 상삼마을 친정동네에도 시끌벅적 새 바람이 불어온 것은 전봇대가 세워지기 시작하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