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일요일 아침이면 가족들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작업복대신 깨끗한 옷을 갈아입은 아버지와 엄마를 따라 아랫마을공소에 가기 때문이었다. 맨 앞에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고 나서면 나는 그 자전거 뒤에 끈을 맨 세발자전거를 탔다. 뒤이어 엄마와 남동생 셋은 타박타박 걸었다.
내리막 마을길을 빠져나와 신작로로 들어서면 길은 넓어지지만 먼지가 풀풀 날렸다. 조심스레 앞서 가던 자전거가 한 번씩 비틀거리면 세발자전거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버지 자전거와 연결된 끈이 좋은 점도 있지만 넘어지면 세우고 다시 출발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신작로에는 버드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큰집 방앗간이었다. 떡 하느라 뭉게뭉게 김이 오르는 모습을 보거나 털털 방아 찧는 기계 소릴 들으며 가다 보면 작은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 앞에 잠시 멈춰서 숨 고르기 한 뒤 다시 가다 산모퉁이를 돌고 나면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그 저수지 안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벚나무도 한 그루 있어서 꽃이 피면 장관이었다. 저수지 옆길로 집이 하나 둘 붙어 있는 길쭉한 동네입구가 나타났다.
초가와 기와집을 몇 지나 마을 중간쯤에 다다르면 지붕에 십자가를 세운 신식 건물인 공소가 있었다. 공소란 가톨릭 사제가 기거하지 않는 작은 성당이다. 그 공소 마당에는 꽃밭이 제법 넓었다. 그 꽃밭이 봄이 되면 꽃 대궐로 바뀌었다.
공소예절을 바치고 나면 마을 내 다른 집들 마당의 꽃구경을 했다. 점심때가 되면 평소에는 삶은 고구마나 감자를 먹었다. 마을 내에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는 그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 맛난 음식을 실컷 먹곤 했다. 그 즐거운 일요일 나들이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이모 집으로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끔 공소에 오신 독일신부님께서는 간식을 내어 놓고 아이들의 마음을 훔쳤다. 파삭하면서도 달콤 쌉쌀한 초콜릿에다 아주 가끔은 생소한 과일을 들고 오셨다. 그런 날이면 동생들보다 항상 내 것이 더 많았다. 작고 깡말라서인지, 아니면 유별난 아버지의 보살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나는 집에서나 바깥에서도 늘 서열 일 순위였다.
돌아보면 빨리 봄이 오기를 고대하던 긴 겨울 끝의 공소나들이가 가장 그립고 가고픈 때다. 서걱대는 댓바람소리와 삐걱대던 나무마루와 반듯한 댓돌과 유리창문을 열어 놓으면 봄맞이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었다.
그 공소 자리는 지금은 공터가 되었다. 그 공터마저 풀숲이 된 지 오래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꽃 대궐로 남아 가끔 꿈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