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지 사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겨우내 외양간에만 머물던 소가 마당에 풀려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 소에다 달구지를 끌고서 삼십 리쯤 떨어져 있는 읍내 장에 갔다. 겨울에 만들어 놓은 짚으로 짠 가마니와 멍석에다 싸릿대로 짠 소쿠리가 실려 있었다.
장에서 돌아올 때는 마을사람들이 장에서 산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 식구들이 먹을 고기나 생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와 마을 아이들은 언제쯤 소 방울 소리가 들리나 기다렸다.
아홉 살이던 어느 봄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네 어귀에서 장에 갔다 오던 할아버지와 소달구지를 만났다.
"할배예~~장에 갔다 와 예?""
"아이고. 우리 자야가! 학교 갔다 오나?"
“예, 할베 예, 우리 태워 주이소 예,”
“그래, 조심해서 타라이”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냉큼 달구지를 잡고 한 발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나는 채 다 오르지도 못한 채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깨어보니 읍내 병원이었다. 내 옆에는 놀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제야 다리가 아프다는 걸 느낀 나는 엉엉 울었다. 의사 선생님께선 다친 데가 발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다친 다리를 낫게 하려고 그때부터 날마다 달구지를 타고서 병원을 오갔다. 그러다가 방 안에서 간신히 나 혼자 기어 나와 마루에서 볕을 쬐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당에서 오가는 닭을 쳐다보고 한 마디하고, 구름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가을학기가 시작되고서 간신히 학교에 갔다. 하지만 걸을 수가 없어 아버지 자전거로 등하교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벌써 교실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아 혼자 뒷문으로 들어갔다. 거의 반년을 쉬었었기에 공부에도 지장이 많아 시험을 치면 보통 점수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주눅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소심함은 국민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일은 오래도록 비실한 약골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심함과 부끄러움이 많아짐과 동시에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자연히 집에서도 더 이상 촐랑거릴 힘이 없어 조용한 아이가 되어갔다. 집안에서의 서열 또한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내 인생의 유년기는 그렇게 달구지 사고로 일단락 지어졌다. 그 후 사춘기 터널을 통과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질기도록 내 안의 나는 씩씩하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