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한파가 몰아친다. 불쑥 꽃집에나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겨울까지 마당을 장식했던 꽃들이 삭정이같이 말라서 씨를 훑어 놓고 불쏘시개로라도 써야 하나 싶다. 그렇건만 다행히 볕은 환하여 창가는 온기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길 따라 거슬러 가다 보니 오래전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기어이 첫머리에 ' 창가에 작은 화분 하나 새로 들여놓았습니다.'라고 썼던 편지가 떠오른다.
그 며칠 전부터 부질없이 쏘다니던 마음을 잡을 작정이었다.
마치 평소 등한시하던 집안일에 집중할 듯이 벅벅 빨래를 빨다가 이불까지 밟아서 널곤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싱숭생숭했다.
덩달아 그렇게 화사하게 눈길을 끌던 시클라멘은 줄기조차 마른 지 오래였다. 행여나 다시 싹이 날까 봐 들여다보다 지칠 무렵에야 뿌리가 썩은 줄을 알았다
아니 ,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 여름잠을 자는 줄도 모른 때였다. 그렇게 빈 화분만 처연히 보다가 다시금 생기를 갖기 시작한 계기가 생겼다.
피정센터를 방문했을 때 창가에 나란히 놓여있는 작은 화분들이었다. 그곳에서도 특별히 눈에 띈 것이 바로 털이 보송한 채 물컵에서 앙증맞은 새싹을 키우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름조차 맘에 쏙 든 것이 바로 바이올렛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시골은 먹기 위해서 직접 심는 곡식 종류와 지천으로 때가 되면 무턱대고 자라나서 지청구를 듣는 야생초로 가득했다. 그러니 그다지 꽃이 아닌 이상 눈길을 끌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옆으로 나지막이 잎을 벌린 채 작은 꽃을 피우는 바이올렛은 자꾸 아른거렸다.
그다음 방문을 했을 때에 피정센터 사무실에서 기어이 잎사귀를 몇 개 얻어 와서 나도 창가에 두었다.
그런 얼마쯤 뒤에 잔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두 개 정도는 싹도 틔우곤 해서 마치 아기의 젖니가 자라는 것을 보듯 반갑고 신기해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그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마음까지 온통 빼앗겨가며 들여다보다가 어느 정도 자랐다 싶으면 화분에다 옮겨 심곤 했다.
고 작고 앙증맞은 화초는 한마디로 내게 새롭게 다가온 막연한 기다림 같은 것이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도무지 꽃구경을 못하고 번번 잃었다. 내 마음속의 기대와 꿈이 그러하듯 말이다.
바이올렛처럼 작지만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한 자 한 자 꾹 꾹 눌러썼다.
오래 기도 했다는 말은 아마도 생략했을 것이다.
' 저의 고향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 주된 내용이었으리라.
그때쯤에 바이올렛은 향기가 없이도 날마다 온갖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어느 땐가는 몇 개의 화분에다 옮겨 심고서 가꾸느라 나름 분주하기도 했다. 이번에야 말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분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봄여름이면 뿌리가 송송 나고 싹을 틔워서 희망을 주듯 잘 자라다가도
화분에 옮겨 놓고 나면 꽃 한 송이 피우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도 한 잎씩 접혀가고 있었다.
날마다 설렘과 두근거리는 한편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우울감마저 안개처럼 피어나곤 했지만 나름 동분서주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마치 먼데 산을 오를 목표를 정해놓고 낮은 산부터 차례로 오르내리며 단련하듯 호기심을 갖고 교회 안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때가 되면 오르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이단체 저단체를 기웃대던 발걸음도 뜸할 무렵 건강의 악화로 모든 것을 접기도 했다.
어쩌다 가끔 행복했던 날들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나의 이십 대는 바이올렛처럼 수수한 듯 까탈스러웠다. 또한 여린 듯 때론 주장이 뚜렷했으며 그 어느 것 앞에서도 나를 포기한 것이 없었다. 외려 다 움켜쥐고 감당 못할 버거움으로 바둥거리기 바빴던 같다. 아마도 그 모든 흔들림과 설렘을 사랑이라 우기고 싶었던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피우고야 말리라 다짐하며 제값을 지불하고 구입한 바이올렛도 기어이 꽃구경은 못하고 말았었다.
그때 이후로는 혹 다른 집 창가에 그 꽃이 피고 있어도 더 이상 분양받을 용기마저 못 내었다. 그러다가 꽃이 보고 싶을 때면 그 집으로 꽃구경 가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의 젊은 날들은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런 멋진 시와 결부하기에는 어쩐지 흠집이 많다.
그렇거나 말거나 만약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오로지 꽃 한 송이 피워보겠다고 해마다 봄이면 물병에 꽂아둔 바이올렛 같은 기다림과 설렘에다 가장 귀하고 높은 가치를 매기면서 말이다.
가까이 갈 순 없으나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만으로도 솜털이 보송보송 일어날 듯하던 그 설렘 또한 내 인생의 봄날에나 느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