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쟁이 말보다 더 센 선언을 한 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그날 밤은 유달리 어둡고 막막했었다. 더구나 그저 그런 흉내라도 내면 혹시 남편의 몸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시던 주변분들의 말들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 마음을 정리도 못한 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이후 며칠간 잠시라도 가족을 떠나서 살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 유혹과 싸우고 있는 중에도 밤마다 꿈을 꾸었다.
무려 사흘 간이나 시리즈로 연결되던 꿈의 주제는 '참고 지내라'였다. 먼 미래까지 한눈에 보듯 깨어나서도 생생했다. 순전히 남편과 가족에게만 책임 지울 일이 아니라 내게도 바뀌어야 하고 달라져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꿈에 보인 사람들 표현이 마치 현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태풍이 불면 나무라지 말고 지나갈 때까지 납작 엎드려라'란 성서 말씀도 무척 힘이 셌다. 그리하여 간신히 '네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것이었다. 흔들 비틀 자리는 위태하고 가슴이 아파서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폭풍의 잔해는 참혹했다. 간신히 뼈대만 남은 집의 지붕을 고치고 문을 달듯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더 좋은 부모가 되지는 못하나 어린아이들에게 부모의 갈라짐으로 감당 못할 상처를 안게 하는 슬픔만은 막아야 했다. 어떤 모습으로든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언젠가는 주님께서 마련한 따스한 봄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선택한 것이다.
남편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족들 말과 태도는 더욱 냉랭하고 버거워져 갔다. 그런 시원찮은 허수아비 같은 엄마일지라도 아이들은 된장국 하나에도 게눈 감추듯 먹고서 눈망울을 반짝였다. 남편의 피부병 관리차 단출한 식단으로 인해 아이들 얼굴은 마른버짐이 필 정도였지만 환하게 웃는 그 모습만 봐도 응어리진 내 마음이 풀릴 정도로 아이들이 내 울타리였다.
그 울타리에선 종종 예상치도 않은 열매들이 열리곤 했다. 아이들은 서로 시샘하듯 상장을 들고 왔다. 한동안 막내를 데리고 다니면 할머니 인가하며 묻곤 하던 동료 엄마들로부터 어느새 뒤에서 '누구 엄마 아닌가요?'라고 불러 세울 만치 나는 은근 주목받고 있었다.
납작 엎드리란 성서 말씀에 따라 행동을 취하기로 한 뒤 한동안 성당 근처를 가지 않았다. 그 기간은 몇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면 가족들은 절에라도 열심히 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한번 흔들린 대나무는 급기야 목장과 부부의 방까지 들어와 버렸다. 그런 미신행위는 계속되었어도 남편의 몸은 변화가 없었다. 외려 가족 간의 갈등만 점점 더 다양해져 갔다. 그때쯤 아마도 한동안 잠잠하시던 아버님의 가슴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가만히 있어도 땀나는 뜨거운 여름날 같았다. 그 여름은 언제 끝나나 싶을 정도로 수년을 끌었다.
덩달아 나 자신 또한 걸핏하면 관계에서 오는 걸림돌에 넘어지면서 아프다고 소리쳤다. 어떨 때는 더 큰소리로 분노하고 악을 쓰고 있었다.
성서 말씀은 그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라 했는데 나는 허리 펴고 태풍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느려 터진 내 일상은 더 엉망이었다. 서로를 톱니처럼 물고 도는 삶의 도돌이를 멈춰야 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가야 했다. 어떤 형태로든 벗어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