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소녀를 사랑한 남자 2화
-----박평화 아저씨도, 송반장 아저씨도 존재하는 바다였다-------
다음 날, 송반장이 마크를 자르고 있는 나에게 왔다.
"어이 미스 산골, 너 저 노무과 직원이랑 아는 사이?
너의 삼촌이라도?"
엄청 어색하고 간단하게 물으며 내가 잘라놓은 마크를 모아서 정리했다.
나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마크를 조무락거리는 태도가 비굴해 보이기도 했다.
비굴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아우라에 지린다.
그 지리는 불안을 해소한답시고, 힘겨루기를 시도한다.
송반장의 무의식은 나의 아우라에 질려서 의식적으로 힘겨루기 시동을 걸었다.
파도가 넘실대는 마크를 정리하는 척하며 나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요, 모르는 사람인데요."
나의 대답이 나오려고 입모양이 움직이는 순간,
옆에서 열심히 미싱을 돌리던 노동자들의 동작도 일시적으로 느려졌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어린아이의 남다른 등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인간적 무의식의 가벼움.
그 이유도 나중에 알았다.
노무과 직원이 신입 노동자의 손을 잡고 부서장에게 인수인계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어떻게든 일반화시키려는 집단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 후 박평화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입사하여 마크를 자른 지 한 달여 되었다.
나의 마크를 자르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가위질 속도가 빨라진 데는 송반장이 크게 기여했다.
눈총을 쏘며 재촉했다.
"어이, 미스 산골, 뭐하노!!!
마크 모자라는 것 안 비나?"
거칠고 투박한 말투에 잔뜩 겁이 나서 눈감고 잘라도 정확하게 자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미리 잘라놓은 예비 물량이 몇 박스가 쌓였다.
"어이, 미스 산골, 이제 선 긋는 작업도 함께 하제이."
나는 송반장이 시키는 대로 초크로 원단에 선 긋는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
초크로 원단에 선 긋는 작업은 단순 작업이 아니었다.
완성품 원단에 초크 자국이 보이면 여지없이 핀잔이 날아왔다. 미싱사가 선을 이탈하여 재봉하여도 초크 선을 잘못 그었다고 판정했다. 초크 초크 초크 초크 자국 실수!! 나는 초콜릿을 봐도 초크 실수가 떠올랐다.
게다가 점심시간과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휴식 시간에는 마크를 자르기도 해야 했다.
마크 자르기는 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초크 잡은 손가락에 껍질이 벗겨지고, 마크 자르는 엄지, 검지에는 물집이 생겼다.
물집이 생겼다 터지고 아물어갔지만 마음은 아물지 않았다.
송반장은 초크 줄 긋는 생산 라인 옆에 마크 자리를 별도로 만들며 나의 업무를 당연시했다.
초크 줄 긋고, 마크 자르고, 초크 줄 긋기
초크 줄
초크 줄, 초크 줄, 초크 줄 마크 마크
초크 줄, 초크 줄, 초클 줄 마크 마크 마크
나는 초콜릿만 봐도 입맛이 떨어지고, 심지어 촛불만 바라봐도 초크가 생각났다.
초크 줄을 가늘게 그으려고 온갖 궁리를 했다.
마침 양면 도루코 날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초크의 끝이 뭉툭해지기 전에 노루코 날로 초크의 끝을 갈았다.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요령이었기에 몰래 재빠르게 갈았다.
원단의 색이 빨강일 때는 빨강 가루가 작업에 묻었고, 파랑일 때는 파랑가루가 묻었고,
노랑일 때는 온통 똥가루가 묻었다. 어찌 되었든 초코 줄 긋기의 속도는 몇 배로 빨라졌다.
신기하게도 초크선 이탈로 인한 불량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작업복이 온갖 초크색으로 지저분해졌을 뿐이다.

손가락에는 반창고와 대일밴드로 칭칭 감았다.
초크 줄 긋기를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사각사각 마크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곁눈질로 보니, 박평화 아저씨가 마크를 자르며 서있었다. 내 대신.
박평화 아저씨를 바로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휘야, 작업복 새것 가져왔다.
초크가 묻어서 얼룩덜룩하더라.
새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와라. 지금!"
연어 엄마는 바다로 보낸 새끼 연어를 찾아오지 않지만
박평화 아저씨는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는 며칠 동안 작업복이 더러운 무지개 색으로 변한 것도 몰랐지만
박평화 아저씨는 알고 있었다. 그런 무자비하게 바쁜 상황에서 박평화 아저씨에게
고맙지도 않았다.
다양한 초크 색으로 덕지덕지한 내 작업복을 보며
세상에 태어나 더러운 무지개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현장에서 몇 계단 올라가면 커튼으로 대충 가려진 탈의실이다.
탈의실 바로 옆은 사무실이다. 새 작업복을 갈아입으며 삐죽 열린 사무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사무실을 문을 닫으려는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순식간에 입을 막는 손과 몸을 부둥켜안는 거세고 음험한 기운이 덮쳐온다.
더러운 작업복 주머니에서 초크를 뾰족하게 갈던 용도인 도루코 면도날을 새 작업복 주머니로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음험하고 더러운 기운을 내뿜는 이가 송반장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당연한 반사로 도루코 면도날을 휘어서 쥐었다. 꼭 쥐었다. 저절로 꼭 쥐어졌다.
무작정 움켜쥔 면도날이 상대방의 얼굴 가죽 어딘가를 깊게 벤만큼
나의 손바닥도 깊게 베였다. 손바닥이 샴박슴벅함이 느껴질 때였다.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더 클 때 신체의 아픔은 인지되지 않는다.
피부 가죽이 긁히고 베여, 피해자, 가해자를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송반장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나도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송반장이 둔탁하게 철재 계단에서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에 흥덩한 액체 질감을 뿌리면서 엉거주춤 뛰었다.
고장 난 기계가 즐비한 구석의 그림자 사이사이로 웅크린 채 뛰었다.

나는 완성품 원단이 머무는 창고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갔다.
사이즈별로 차곡차곡 묶인 완성품 원단 사이에 몸을 숨겼다.
뭔가 큰 피해를 당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큰 피해를 입힌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면도칼을 쥔 손이 슴벅슴벅 짜릿하게 아프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면도칼이 찍히고 베여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파도마크가 붙은 완성품 원단에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얼른 손을 원단이 없는 쪽으로 떨구었다. 마침 원단을 묶고 남은 자투리 천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피 묻은 면도날을 들어서 자투리 천을 잘랐다. 왼손잡이인 나의 왼손바닥과 손가락이 너덜거렸다.
베이고, 파인 생선회처럼 너절했다.
천으로 왼손을 둘둘 감았다. 한참을 그대로 완성품 원단의 틈에 웅크려 동태를 살폈다.
신기하게 아무 일도 없이 미싱들은 잘 돌아갔다.
차츰 안심이 되어가자, 밖을 생쥐처럼 내다보았다.
박평화 아저씨가 사무실 계단을 내려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완성품 원단 사이로 몸을 말아서 숨었다. 아기 고양이 새끼처럼.
나는 그대로 웅크리고 있다가 퇴근 시간에 정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시계가 보이지 않아도 퇴근 시간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느슨하고, 차분하면서도 들뜬 열정이 창고 쪽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고양이처럼 납작하고 유연하게 창고를 슬쩍 빠져나왔다.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벌써 정문으로 쏠리고 있었다.
사람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모르는 사람 사이에 섞이는 안도감은
예상하지 못한 위로였다. 유유히 무사히 정문을 통과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문학, 치유로 살아나다저자평생 소설을 쓰고, 지금도 소설을 쓰며, 마치 이루어진 듯한 판타지를 지향하는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