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남자들

16세 소녀를 사랑한 남자 최종회

----------퇴사와 재입사------------------


나는 스스로 그날 퇴사했다. 퇴사의 선언은 통쾌함을 주었다.

하지만 그 자유와 안도감은 사흘을 넘길 수 없었다.

그 사흘은 왼손 바닥의 면도칼에 베이고 파인 상처가 아무는 기간이었다.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크나큰 사건이 생기고

저절로 상처는 아물고 있지만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었다.

전화기가 귀했던 90년대의 공허하지만 여유롭기도 했던 풍경이다.

그 공허와 여유 사이에 가끔 신과 악마가 인간의 품격으로

개입하기 쉬웠던 시절이다.

나는 당장 빵이 떨어지고 당장 다음 달에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다시 출렁미싱으로 돌아갈 궁리를 해야만 했다.

아는 것이 적으니 결정하는 고민도 단순했다.

16세의 특권이자 비좁아 터지는 처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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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박평화 아저씨가 떠올랐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출렁미싱 정문에서 박평화 아저씨를 기다렸다.

정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전봇대를 레이다망 거치대로 삼았다.

7시가 되어, 어둠이 깔리자 출렁미싱의 거대한 정문이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하루의 에너지를 빨린 노동자들은 출렁미싱의 정문에서 썰물에 밀린 파도더미 같았다.

인적이 뜸해져도 박평화 아저씨는 나오지 않았다.

파도가 점점 어둠으로 변하자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두려웠다.

두려운 마음이 생기자마자 송반장의 존재가 경비로부터 퇴근 몸수색하는 모습이 보였다.

송반장은 얼굴에 붕대를 감고 눈만 내놓은 상태였다.

두려운 마음의 실체는 송반장의 정체였음을 알았다.

인간의 무의식은 자신의 신변과 관련된 생각보다 많은 감지 능력이 있다.

이 감지 능력을 초능력으로 인지한 사람이 있고, 두려움으로 인지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날 이 감지 능력을 초능력으로 받아들였다.

송반장의 얼굴은 붕대에 감겨있었지만 눈빛은 더 희번덕거렸다.

나는 잽싸게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그의 동태를 살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왼손바닥의

상처도 슴벅슴벅 뛰었다. 송반장의 뒤통수까지 어둠이 삼키자, 심장이 안정되었다.

다시 나의 레이다는 출렁미싱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안전관리 두 명이 양쪽에서 문을 밀며 가까워졌다.

정문이 잠기자 돌아설까, 더 기다릴까 망설이자 묘하게 가슴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그 안정되고 편안한 마음은 바로 박평화 아저씨가 가까워짐을 감지한 느낌이었다.

단정하게 양복 차림을 한 아저씨가 경비들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나오고 있었다.

박평화 아저씨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전봇대 뒤로 숨었다.

나의 무의식은 박평화 아저씨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것은 감사함의 한 형태임을

아주 나중에, 나중에서야 알았다.

박평화 아저씨가 가까워지자 전봇대를 따라 빙빙 돌았다. 왠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전봇대를 방패 삼아 박평화 아저씨와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박평화 아저씨가 충분히 비켜갔을 즈음이라 여기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박평화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전봇대를 사이에 두고.

"니 여기서 뭐하노?

왜 사흘동안 결근했노?

너는 무단 퇴사로 접수되었다.

하지만 내일 아무일도 없듯이 출근하면 아무 일도 없이 처리될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인사만 두 번 할 수 있었다.

"안녕하셔요."

"안녕히 가셔요."

하지만 이 인사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고개로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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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원짜리를 넣어라------------

당장의 빵값이 필요한 사람은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 체면 따위를 생각하면 안 된다.

다음 날 아침에 아무 일도 없는 듯 출근을 했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송반장이 나를 보고 귀신을 보듯 더 놀랐다.

그는 붕대에 감긴 내 왼손을 힐끔 보고 무의식 중에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다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조우이다.

예상치 않은 악마의 반응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악마와 나는 그 순간 같은 걱정을 했을 것이다.

면도칼에 파이고 베인 저 손으로 초크 선을 그리고 마크를 자를 수 있을까는

공통의 걱정이다. 악마와 천사는 항상 교차점에 서 있다.

그 순간, 박평화 아저씨가 나타났다.

"휘는 오늘 월급 계산하러 갈 겁니다."

이 말에 송반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표정이었다.

마치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간 사람처럼 흥분하여 얼떨결에 거수경례까지 붙였다.

박평화 아저씨는 어벙하게 서있는 송반장을 스르륵 밀며 붕대가 감긴 나의 왼손 손목을 잡았다.

"휘야, 오늘부터 3일 동안 월급 계산하는 업무를 해야 한다."

일부러 송반장에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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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의 면도날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붕대 위로 느껴지는 아저씨의 체온은 따뜻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체온은 모든 상황을 대신했고

말보다 훨씬 정확했다. 거룩했다. 위대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출렁회사의 월급봉투 만드는 곳은 넓었다.

몇 천명(몇 만 명일 수도 있다)의 노동자에게 지급할 월급을 주려고 준비한 돈다발이

쌀가마처럼 쟁여져 있었다. 그 당시는 500원짜리도 지폐였다.

100원, 50원, 10원짜리 동전이 드럼통에 담겨있었다.

나는 10원짜리를 월급봉투에 넣는 일에 투여되었다.

박평화 아저씨는 최종적으로 금액을 확인하고 봉인하는 임무였다.

10원짜리 동전을 세어서 봉투에 넣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오후가 되자 하얀 붕대에 돈 때가 묻어 검게 변했다.

돈 냄새는 비리고, 맵고, 따갑고, 짠내가 진동했다.

돈 냄새는 더럽고 아니꼬았다. 돈 냄새는 코를 마비시키지 않았다. 갈수록 더 진해졌다.

3일 동안 월급봉투에 돈을 넣을 때, 내 월급봉투가 내 손을 지나갔다.

나는 그 누구의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10원짜리만 챙겨서 넣었다. 몰두했다.

박평화 아저씨는 봉인한 내 월급봉투를 보여주었다.

나는 내 월급이 그저 신기했다.

"휘의 월급이 송반장 월급보다 많네.

송반장은 희망이 없는 국졸의 노동자고, 휘는 희망이 있는 예비 고등학생으로

월급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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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부서로 돌아가서 월급을 받고 공식적으로 퇴사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방학 때면 출렁 미싱에 단기 입사하여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박평화 아저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궁금한 적도 없다.

아예 잊혔다.

그런데 자정이 지난밤의 외진 길을 걷다가 괴한을 만나 도로에 뛰어들었을 때

차를 세운 운전자의 실루엣은 낯익었다.

세무서에 부가세 신고를 할 때 부도난 기업의 세금계산서를 들고 울어버리고 싶을 때

갑자기 나타나 전자계산기를 조용히 두드려주던 직원의 실루엣은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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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지나서 출렁 미싱의 잔재와 같은 경비실에서 박평화 아저씨의 존재를

아무리 찾아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분명히 박평화 아저씨와 빙빙 돌던 전봇대는 그대로인데

박평화라는 노무과 직원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박평목, 박평수, 박팽기, 박목월, 박평묵, 박평정...

박평화 아저씨는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박평화 아저씨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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