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거든
먼저 보상하고 나중에 사과하는 절차를 밟는 편이 유리하다.
자식이 어릴 때는 뜻하지 않게 곤란한 일을 겪는다.
아이가 어렸을 때, 한 지붕 다가구 주택에서 살았다.
여러 가구가 같은 옥상과 마당을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도 많고 정겹지만
가끔 곤란한 일도 있다.
아이가 서너 살 즈음이었을 때 빨래를 옥상에 널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세상이 훤히 보여서 좋았는지
아이는 부리나케 따라 올라왔다.
빨래를 널고 있는데 우장창 무엇인가 깨졌다.
아이는 옆방 할머니의 된장독 뚜껑을 깨뜨렸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고, 뚜껑만 박살이 났다.
얼른 깨진 조각을 처리했다.
부랴부랴 엄마한테 전화하여 옹기그릇 파는 곳을 물었다.
겨우겨우 옹기전을 찾았다.
아이가 깬 된장 뚜껑과 제일 비슷한 뚜껑을 얼른 샀다.
부랴부랴 된장 뚜껑 덮어놓으니 감쪽같았다.
새 뚜껑이라서 살짝 더 빛나고 더 고급스러웠지만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다음날 된장뚜껑 할머니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할머니를 보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할머니의 손에는 수박이 반통 들려있었다.
수박 한 통이 많아서 반통을 우리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말씀이 이어졌다.
"새댁,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누가 옥상에 된장독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자를 씌워놨다!! 이런 희한한 일도 있나?"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제야 된장뚜껑이 바뀐 사실을 말씀드리고, 사과했다.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발등이라도 다치지 않았냐고 물으시며 내 등을 토닥이시며 조언하셨다.
"앞으로 같은 집에 살면서 이런 일이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친정엄마처럼 대해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마음 졸이지 말고 살그레이,
된장 뚜껑 새것으로 바꿔줘서 고맙데이."
그 후로도 사소한 일들은 몇 번 더 있었다.
아이가 할머니 화분에 꽃을 모두 따고,
할머니 평상에 낙서를 하는 등
그때마다 그에 준하는 물질로 보상했다.
나는 당연한 도리를 했을 뿐인데, 할머니는 마치 내 아이를 손자대하듯 하셨다.
맵지 않게 전을 부쳐서 아이를 먹이시고,
모시 조끼를 만들어서 입히시고,
곰탕을 끓이면 아이먹이라고 큰통에 떠서 갖다주셨다.
나름 '선보상 후사과'의 원칙이 서로에게 편했다.
뿐만 아니라 '선보상'은 서로의 관계를 명확하고 친근하게 이어줬다.
'선보상 후사과'의 원칙은 '돈으로 뭐든 해결한다'는
의미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보살피는 보상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한다.
청소년 성장소설로 잘 알려진 헤르만 해세의 '공작나방'은
사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친구의 희귀한 공작나비를 부스러트린 소년은 용서받지 못했다.
소년의 사과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그 희귀한 공작나비를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이런 사과는 상대방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고,
자신의 죄책감을 더는 쪽에 무게가 실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혔을 때는
성급한 사과를 하기 전에 자신이 그 문제를 진심으로 끌어안고
고민의 시간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과를 서두르는 이유가
자신이 감내하기에 벅차서 상대에게 떠넘기려는 무의식적인 발로일 수도 있다.
피해가 대체할 수 없는 물질이라서
보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로 귀결될 수는 없다.
사과가 느리더라도 보상은 가급적 빨라야 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선보상 후사과의 태도로 다가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보다 더 근사한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