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현장, 그 공간적 의미 ― 기림
서울에서 살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서울이 낯설다. 여행을 가는 마음으로 가볍게 짐을 챙기고 탐방지로 떠났다. <그때 그곳>이라는 기획 글을 준비하고 글을 쓰는 건 단순히 일이라기보단 서울에 애정을 붙이기 위한 노력이자, 일상을 비일 상으로 만들어 하루를 보다 다채롭게 하는 과정이었다. 문익환 통일의집 가족들이 남긴 기록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숙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원래 <그때 그곳>을 맡아 쓰시던 자원봉사자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그때 그곳> 코너를 급히 맡게 되어 내가 쓴 글은 고작 두 편이지만 국립 4.19 민주묘지도 연세대학교도 내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장소로 탈바꿈했다.
특정 장소, 공간으로 여행한다는 것이 때론 마법같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가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땅 자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나를 구성하는 몸 그 자체가 거대한 역사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장소에 남아있는 시간의 흐름을 더듬으며 그달의 주제가 되는 장소를 걸어 다녔다.
글의 시작엔 내가 그 장소에서 처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서술했다. 내가 느낀 장소의 첫인상을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함께 상상하며 몰입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국립 4·19 민주묘지를 찾았다. 민주성역이라는 표지석 뒤로 눈 덮인 북한산이 보인다. 묘역 입구 한편에 있는 아침이슬 악보를 발견하여 가수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들으며 묘역을 향해 올라갔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라는 가사를 되뇌며 문익환 목사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월간 문익환』 3월호 <그때 그곳> 국립 4·19 민주묘지)”
“백양로를 따라 수업을 가는 대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니 새삼 나도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묘한 설렘을 몰래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성한 자식들과 모교를 찾은 들뜬 표정의 한 아버지가 보였다. 자신이 젊을 적 신촌역에서 사회과학대 건물까지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 푸념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갓 연세대에 입학한 학생이 부모님에게 연세대 캠퍼스를 보여주며 조잘거리는 모습이 퍽 자랑스러워 보였다.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조심스럽게 서성이는 발 이, 앞으로 펼쳐질 대학생활에 설렘 가득한 걸음걸이가, 서둘러 강의 실로 향하는 바쁜 발걸음이 그 백양로에 가득 묻어있었다. (『월간 문익환』 4월호 <그때 그곳> 연세대학교)”
여담이지만 김민기의 아침이슬 악보도 국립 4·19 민주묘지 바로 앞에서 보고 정말 그의 노래 아침이슬을 들으며 올라갔다. 그 이후로 김민기의 전곡을 다 듣고 너무 좋아서 작은 연못을 통화연결음으로 정해놨다가 친구들에게 나이대와 맞지 않는다는 놀림을 받고 있다. 불과 한 달 전에 고인이 된 김민기와 지인이신 어떤 선생님께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울먹이기도 하셨다.
‘국립 4·19 민주묘지’, ‘연세대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장소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아주 작은 공간, 물건에도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어떻게 쓰게 되었을까? 누가 이 아침이슬 악보를 국립 4·19 민주묘지 앞에 세워둘 기획을 했을까? 백양로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등. 당장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한다. ‘이렇지 않았을까?’ 하며 결코 정답은 아닐, 수많은 가능성을 혼자 상상한다. 그러다 보면 이 공간이 오늘 내가 서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 거쳐 갔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듯해서 어지러울 정도다.
그 상상의 해상도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 바로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사료였다. 사료는 그것을 남긴 그 순간이 진실이었음을 현재에서 증명하는 물체이다. 순간의 진실을 간직한 사료는 내 머릿속 상상과 내 육체가 존재하는 현실의 그 모호한 경계에 과거를 소환한다. ‘사료 속의 이야기’와 ‘그 사료가 만들어졌을 공간’이라는 별것 아닌 것 같은 두 꼭지가 내게 상상 속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서사를 알게 하고, 냄새를 맡게 하고, 그들의 표정을 또렷하게 보게 한다. 과거 그 공간에서 찍은 사진, 연설, 편지와 같은 사료엔 통일의집 가족의 생각과 감정이 가득 녹아들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문익환 목사가 있던 시대로 떠난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4.19 묘지가 가깝기 때문에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죠. 대문에는 아! 4.19 영원히 살아있다.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이어라.라고 써 붙였읍니다. (박용길 편지 1979.4.19)”
박용길 장로가 1960년으로부터 19년이 지난 79년에 그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과 비슷하다. 문익환 통일의집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 79년부터 45년이 지난 2024년의 나는 박용길 장로가 그들의 함성을 상상하며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이 기록을 통해 보는 통일의집 가족들의 표정은 때론 몹시 슬프기도, 분노에 차 있기도 하고, 설레는 희망에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슬플 때는 울고, 화날 때는 화를 내고, 기쁠 때는 온전히 기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 가족의 기록을 보며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그저 가족의 기록이 아니라 식민지, 한국전쟁, 독재라는 험난한 시기를 살다 간 삶의 대선배들이 본인의 삶에 비추어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말라고.
<그때 그곳>은 현재로 소환된 과거가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 집중하면서 썼다. 공간과 사료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미래로 이어졌다. 인지했든 인지하지 못했든 과거와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를 형성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공간은 시간을 초월한다. 나는 그 연속성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그 문익환 목사가 떠나간 지도 3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반복되는 슬픔, 환희, 부끄러움, 답답함과 기다림을 품고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 아침 10시 미세먼지로 조금은 텁텁한 공기를 맛보며, 선생님과 함께 답사하러 나온 학생들, 손잡고 4·19 묘역을 한 바퀴 산책하는 노부부를 보았다. 국립 4·19 민주묘지는 인근 주민들에겐 공원이자, 배움의 터, 삶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4·19 혁명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는 공간 속에서 산자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박용길 장로의 말씀처럼 이들은 공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월간 문익환』 3월호 <그때 그곳> 국립 4·19 민주묘지)”
서울에선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사라지고 바뀌고 떠나간다. 사람도 사람의 기억이 머물다 간 장소도 빠르게 바뀐다.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공간과 사람 사이의 단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로 이어진다. 서울이 내게 낯선 이유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그런 와중에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굳건히 기억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척 귀하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때 그곳>의 장소들. 그 과거가 실존했고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 내가 이 땅을 밟고 살아있었음을 미래에도 증명할 장소. 이런 변함없는 장소들 덕분에, 서울살이에 의미를 찾으며 산다.
글쓴이_기림 얼떨결에 합류하게 된 시민사회 활동가이자 예비연구자. 글을 쓰다 보니 아카이브와 글쓰기에 커져가는 애정을 느끼고 있다. 평화학을 전공했고 개인의 기억과 기록에서 솟아나는 평화의 조각을 이어붙이는 것에 관심이 많다.
● 아카이브에서 『월간 문익환』 2024년 4월호 <그때 그곳: 연세대학교> 읽기
https://archivecenter.net/tongilhouse/archive/collection/ArchiveCollectionView.do?con_id=2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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