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터뷰하는 날의 풍경 ― 만당
“천안이라 멀지 않아서 좋네요.”
에바가 곽노순* 목사님(*문익환의 제자이자 성서번역 동료)의 거주지가 천안이라 말했을 때, 백총이 즉각 경쾌하게 반응했다. 앞선 수도권 밖 출장은 전주, 부여, 익산이었다. 이번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 쐬듯 다녀오자는 분위기다.
인터뷰 준비를 맡은 나는 분주해졌다. 2024년 1월 2일 연로하신 곽 목사님을 보살피는 제자와 연락을 주고받아 1월 8일 월요일 2시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자료를 찾아보고 질문 문항도 만들어 팀원들과 공유했다.
약속한 날 낮 12시 천안에 도착,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백총을 만났다. 목사님 댁까지는 버스로 불과 20분 내외다. 목사님 동네로 가서 점심을 먹고 에바와 지노를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는 금방 천안 도심을 벗어나 목적지 동네로 들어섰다. 주변에 몇 개 대학 캠퍼스가 있지만 방학 중이라 한적한 느낌이다. 주말 동안 눈이 꽤 내린 탓에 세상이 하얗게 덮인 상태라 더 그랬다. 목사님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위치한 동네는 아늑한 느낌이었다. 주변의 낮은 산이 동그랗게 동네를 크게 품은 듯하여 인상이 무척 좋았다.
네 사람이 목사님 댁으로 들어섰다. 목사님과 제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성서공회사 책 중 성경 번역 부분을 미리 펼쳐놓고 당시 사진도 여러 장 준비해 놓고 계셨다. 오늘을 무척 기다렸다는 듯이.
여느 다른 원로분들과 마찬가지로 곽 목사님 입에서도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자동으로 줄줄 이어져 나온다. 준비한 인터뷰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다.
흥미로운 일화와 소소한 일들을 생생하게 그려 내신다. 한신대 재학 때 “출석 일수 하루 모자란다고 문익환 목사님(교수)이 전화했는데, 나는 배울 거 다 배웠다고 안 갔지”라며 둘이 서로 막상막하였단다. 인터뷰의 재미가 쏠쏠하고, 웃을 기회도 많다.
한편, 본인 별명은 면도칼, 사리 판단에서는 ‘맞냐 틀리냐?’만이 유일한 기준이라는 분. 말씀하시는 투는 강했고, 판단이나 행동에서도 타협 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임을 드러내셨다.
인터뷰가 1시간 반을 넘어가자 우리 넷은 자세를 흩트리며 끝내려고 서두르는 모양새다. 쉽지는 않다. 하고 싶은 말씀이 오죽 많으실까? 결국 2시간 10분을 넘기며 끝났다. 당초 계획이 1시간 반. 우선 연로하신 분임을 고려해서다. 또, 원로들의 이야기보따리가 한번 풀리면 끝이 없다는 걸 몇 번 경험해서다. 그러나 이번에도 계획은 여지없이 깨졌다.
힘든 점이 있었다. 발음이 명확지 않으시니 단어와 문맥을 놓치는 경우가 계속됐다. 나는 목사님 말씀을 알아채기 위해 인터뷰 내내 귀를 쫑긋하고 입술 모양을 쳐다보는 등 애를 써야만 했다. 인터뷰 후 녹음 해독본을 출력해 보니 기계도 음성을 잘못 알아들은 오류가 수없이 나타났다. 2시간짜리 녹음을 틀어놓고 이상한 부분에선 반복해서 들으며, 해독 오류를 빨간 펜으로 바로잡느라 진땀을 뺐다.
이날 인터뷰도 성공적이었다. 우리가 원했던 바를 확실히 가졌다. 곽 목사님이 통찰력 있는 한마디를 던져 주신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100% 순수 어린아이가 늙어서까지 순수를 지킨 유일한 케이스, 순수 그 자체야!” 인터뷰의 목적은 이런 걸 얻는 데 있다.
인터뷰를 끝내고 목사님은 아까 보여준 자신의 저서를 한 권씩 주셨다. 『우주의 파노라마 - 21세를 향한 과학과 종교』 표지 안쪽에는 ‘영원한 동심 늦봄 문익환 님께 바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목사님 아파트를 나오며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백총은 오늘 인터뷰의 ‘야마’(*핵심 주제를 뜻하는 언론계 은어)가 분명하단다. 지노와 에바도 핵심이 되는 꼭지들이 여러 개 있다고 거든다. 나도 동감이다. 원고 쓰기에 어려움이 없을 듯하니 귀경하는 버스에서 창밖 풍경을 편안하게 즐겼다.
『월간 문익환』 2월호 제작 시 편집장이 뽑은 표지 제목은, “문익환은 100% 순수 그 자체.” 괜찮았다. 시즌2의 인터뷰에서 늦봄과의 기 억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분이 여럿이었던 이유를 알만하다. 그게 다 그분들 가슴에 새겨진 늦봄의 순수함, 그것이 박동했던 탓 아닐까?
곽 목사님 인터뷰 후, 내가 품었던 문 목사님 연상 이미지도 바뀌었다. 정도상 작가 인터뷰를 계기로 생명, 평화, 사랑이라는 가치가 1순위였는데, 이날 이후 순수함이라는 모습이 대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그날 새해 첫 인터뷰에서 늦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찾았다. 늦봄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계기였다.
인터뷰 이후 작업은 나의 몫이다. 창작보다 편집의 문제이고, 단기 집중의 문제다. 2시간의 인터뷰 내용을 되새김하여 전체를 머릿속에 정렬하는 게 우선이다. 이걸 나는 녹음 해독본으로 시작한다. 종이 출력본을 보며 기계의 해독 오류를 바로잡고, 정리할 가치가 있는 부분들을 훑어본다. 자세히 읽기를 몇 번, 뼈대를 생각하며 원고 만들기에 돌입한다. 원고 쓰는 마음이 느긋하지는 않았다. 개인 사정으로 출국해야 할 날이 바로 며칠 후였다. 녹음 해독본과 1차 정리한 원고 파일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서 짬을 내어 1주일 만에 원고를 최종 마무리했다.
글쓴이_만당
콘텐츠에 관심 많은 전직 광고인. 퇴직 후 자료의 디지털화 방법에 대해 궁리하다가 아카이브를 알게 되었고, 늦봄 아카이브에 빠져 자원봉사와 콘텐츠 제작에 열중이다.
● 아카이브에서 『월간 문익환』 2024년 2월호 곽노순 목사 인터뷰 읽기
https://archivecenter.net/tongilhouse/archive/collection/ArchiveCollectionView.do?con_id=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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