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에 빠져 수장고 봉사를 시작하다 ― 영옥
내가 늦봄의 수장고에서 봉사를 시작한 계기를 따져보면 윤동주 때문이다. 윤동주에 빠져 관련 책을 읽고, 관련 장소를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늦봄과 같이한 시간과 장소들이 보인다.
2022년 4월 서울시 50 플러스 북부 캠퍼스에서 열린 4주간의 아카이브 교육을 마친 후 7월부터 한신대 장공 도서관의 늦봄 문익환 수장고에서 시집 교정작업을 시작했다. 교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시를 읽게 되는데 늦봄의 시어에 윤동주의 시어가 자주 눈에 띄었다. 나는 윤동주 시를 자주 읽고, 전 작품을 필사해서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늦봄의 시에서 동주의 언어를, 하나도 아닌 여러 곳에서 만나면서 조금 의아했다. 베꼈다고 해야 되나? 동주의 시를 너무 많이 읽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었나?
맞다. 한 가족이 오랫동안 같이 살다 보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듯이 늦봄은 그냥 늘 곁에 있는 동주의 언어를 썼을 뿐이다.
늦봄은 평생 어릴 적 벗인 동주를 잊지 않았다. 명동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학교를 같이 다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주의 어렸을 때부터 평양 숭실학교를 다닐 때까지의 모습의 대부분은 늦봄의 기억, 늦봄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기억에서 나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늦봄은 1989년 평양에 갈 때도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순안공항 비행기에서 내려 북한 땅을 처음 밟고, 입을 열어 내놓은 말이 윤동주의 <서시> 낭송이었다. 늦봄은 동주를 가슴에 품은 채 <동주야>를 외치며 평생을 살았다. 늦봄은 동주 없이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늦봄의 시에서 동주의 언어를 찾아보자.
늦봄의 시 <발바닥 얼굴>에 나오는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할 / 만신창이 우리의 역사이구나’ 중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할’은 동주의 <새로운 길>의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과 시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어법을 보이고 있다.
또 늦봄의 <방우>를 보면 ‘그런데 그 진실에서 풋사랑의 내음이 풍겨오는 것 같아서 눈을 와짝 떠보았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님은 푸실 푸실 부서져 내리는 방우였습니다.’에서 ‘눈을 와짝 떠보았더니’는 동주의 시 <눈 감고 간다>에서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가 연상된다.
이외에도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는 늦봄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눈물의 마음>에, 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구절로 묘사된다.
또 ‘처럼’이란 격조사는 마치 명사처럼 하나의 행을 차지하고 쓰인 것도 같다. ‘처럼’은 늦봄의 시 <301호실>에서, 동주는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
늦봄의 <301호실>은
‘부서진 번개불
까맣게 속이 타는 빛의 씨알들
처럼
왜 자꾸만
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
이 작은방에’
동주의 <십자가>는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처럼’의 경우 늦봄은 동주의 시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처럼’은 독립된 행으로 강조된다.”라고 말하고 있다(월간중앙 1976년 4월호). 동주가 <십자가>에서 쓴 ‘처럼’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처럼’을 한 행으로 쓰고 있다.
동주의 시 <소년>과 <눈 오는 지도>에 나오는 ‘순이’는 늦봄의 <잠>, <이파리들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늦봄의 시 속에는 동주가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동주야>를 들 수 있고, <추억의 커피잔>, <마지막 시> 등등이다.
<추억의 커피잔>에는 동주의 <자화상>과 비슷한 문맥으로 시작하면서 동주를 그리워한다.
‘거기에는 / 스물두 살 난 윤동주의 / 8센티나 되는 시원한 이마가 / 달처럼 나타났다가 / 바람에 불려 갔습니다 / 1971년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1971년은 늦봄이 봄부터 시를 시작했다고 고백한 해이다. 이 글을 보면서 동주의 이마가 8센티나 되는 시원한 이마를 가졌다는 디테일이 웃음 짓게 한다. 그리고 『윤동주 평전』을 읽고, 용정으로, 교토로, 후쿠오카로, 연세대로, 하숙 집터로 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했던 지인들에게 “동주의 이마가 8센티였대.”라고 말했다. 지인들은 “어떻게 알았어요?” 했고, 답변은 늦봄의 시 <추억의 커피잔>에 나온다고, 그리고 8센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며, “윤동주의 잘생긴 얼굴의 저 이마가 8센티군요!”라며 다시 한번 동주를 기억했다.
1977년 21일간 옥중 단식 시작 전에 쓴 <마지막 시>는 ‘나는 죽는다 /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로 시작한다. 마지막은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 이 밤에도 / 죽음을 살자’로 마친다. 늦봄은 절박한 시점에서 동주를 찾는다.
<동주야>는 온전히 동주와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과의 연결고리로, 동주의 젊음은 현시대 청년들의 표상으로 읽힌다. 구구절절 사이사이마다 늦봄의 회한이 보인다.
평양 숭실학교를 다닐 때 교내 잡지 『숭실 활천』편집진으로 있는 동주가 시를 한 편 내라고 해서 시를 한 편 써갔더니 “이게 어디 시야” 하며 되돌려 주었다. 늦봄은 이후 시를 쓸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늦봄이 쉰이 넘어 40%가 시로 된 구약성서를 번역하게 되면서 동주가 옆에 없는 것이 아쉽다며, 시 공부를 시작한다. 성경을 한국인의 감성에 맞게 표현하기 위한 시 공부였다.
이후 늦봄은 『새삼스런 하루』, 『꿈을 비는 마음』,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두 하늘 한 하늘』, 『옥중일기』 등 5권의 시집을 냈다.
글쓴이_영옥
윤동주를 좋아하다 늦봄을 알게 됐다. 1주일에 한 번 수장고에서 도서 입력 작업을 하고 있다. 책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다행이다. 하지만 더디고, 틀리고, 잊어버리고… 그래도 한다.
● 아카이브에서 『월간 문익환』 ‘시 속의 인물: 윤동주’ 기사 읽기
https://archivecenter.net/tongilhouse/archive/collection/ArchiveCollectionView.do?con_id=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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