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세계에서 교육 고통이 가장 심한 나라 -1
우리나라 학생들이 입시 경쟁을 거치면서 겪는 고통의 크기는 어느 정도 될까? 그 크기를 산술적으로 나타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비교해 볼 수 있는 설문 자료가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고교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는 ‘사활을 건 전쟁터’로 응답한 비율이 80.8%나 되었다(그림4-1)(각주1). 고교 시절을 전쟁터로 규정하는 비율은 우리와 비슷한 입시 제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미국(40.4%)보다 훨씬 높았으며, 같은 동아시아 나라로서 만만치 않은 입시 경쟁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중국(41.8%)과 일본(13.8%)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통상적으로 유럽의 나라들은 입시 경쟁이 훨씬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쯤 되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고통을 가진 나라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림4-1 자국의 고등학교 이미지에 대한 4개국 대학생의 인식
자료: 김희삼(2017). 사회자본에 대한 교육의 역할과 정책방향. 한국개발연구원.
우리나라 학생들이 전쟁과도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내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대학이 한 줄로 서열화되어 있고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대학 체제는 대학입학을 위한 시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촘촘하게 나열된 대학서열에 맞게 학생을 줄 세우려면 시험을 상대평가로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절대평가나 자격고사 같은 제도로는 학생들의 성적이 뭉뚱그려져서 세밀한 줄 세우기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표4-1>에서 보듯 한국은 학교 시험인 내신과 국가시험인 수능이 모두 상대평가로 운영되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각주2) 이런 시험 제도에 대비하다 보니 학교 시험도 수능 시험도 극심한 압박 가운데 치를 수밖에 없고 학교생활은 전쟁터가 된다.
표4-1 세계의 대입 시험 비교
자료: 이혜정(2019). IB를 말한다. 창비교육.
우리나라의 내신과 수능 시험은 5지 선다 선택형 문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상대평가의 특징과 관계가 있다. 학생들의 성적을 촘촘하게 변별하는 데는 논서술형 문제로는 한계가 있다. 논서술형 문제로 학생들의 성적을 1점 단위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힘든 일이다. 논서술형 시험으로는 점수에 초미의 관심사가 집중되어 있는 학생과 학부모의 민원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선택형 문제가 활용된다. 선택형 문제로는 점수 배점을 조정하면 소수점 이하 단위로도 학생들의 성적을 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형 문제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출제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주어진 보기 중에서 정답을 찾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양한 배경지식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래는 홍세화가 그의 책 ‘결: 거침에 대하여’에서 소개한 2019년 프랑스 바칼로레아의 철학과 역사 시험 문제이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문제>
*인문 계열
-시간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헤겔의 ‘법철학(1820)’ 텍스트 읽고 설명하기
*사회경제 계열
-윤리는 최선의 정치인가?
-노동은 인간을 분리하는가?
-라이프니츠의 ‘데카르트의 원리에 관한 일반론(1692) 읽고 설명하기
*자연 계열
-문화의 다양성은 인류 통합에 장애가 되는가?
-자기 의무를 인지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인가?
-프로이트의 '환상의 미래(1927)' 텍스트 읽고 설명하기
<바칼로레아 역사 시험 문제>
주제1: 중동지역은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그 경과에 대해 논하라.
주제2: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정치적 위기 속에서 미디어와 여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라.(각주3)
이 문제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나라의 시험에 대해 개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경쟁으로 고통받는 것도 억울한데 그 시험의 수준마저 한없이 가볍다는 것이다. 줄 세우기에 편리한 단편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입시 경쟁을 거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안쓰럽다.
외국의 학생들에게도 대학 진학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그들도 공부가 늘 즐거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자녀들을 키운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외국의 학생들은 우리나라 학생들만큼의 입시 스트레스는 겪지 않는다. 그들의 경험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두 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공부에 치여 지내지 않았다. 일주일 수업 시수가 27~28시간이었는데 하교한 뒤에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학원에는 가본 적 없다.”(각주4)
“그래서 너희들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경쟁관계가 아닌 거구나?
네. 바칼로레아만 통과하면 대학은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경쟁은 대학에 가서 하거나 그랑제콜 준비 학교 같은 데서 하겠죠. 고등학생들끼리 서로 경쟁할 일은 별로 없어요. 바칼로레아는 거의 90퍼센트가 붙잖아요.”(각주5)
<영국>
“12학년은 우리로 치면 고2다. 고3이 되기 직전인데 남아메리카로 3주간 식구가 여행을 간다는 아이들. 20일간 못 사는 나라로 자원봉사 가는 아이들. 10일간 케냐로 수학여행 가는 아이들. 비용은 다른 문제로 치고 고2가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게 나는 부럽다.”(각주6)
<독일>
“당시 우리 아이가 다니는 김나지움(일반계 고등학교) 13학년 총인원은 100명 정도였다. 그중에 20명 남짓이 부활절 방학에 부모와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그 아이들 모두가 아비투어(대입 자격시험)에 관심 없는 학생은 아니었다. 큰아이는 나름 시험공부를 꽤 열심히 한다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리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대학 입시를 치른 내 눈에는 항상 부족해 보였다.”(각주7)
물론 한두 명의 사례로 그 나라의 입시 상황을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내용이 자기 자녀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그 나라 학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한국 학생들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 우리나라의 학생들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학창 시절을 보내야 할까. 이제는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각주
1) 김희삼(2017). 사회자본에 대한 교육의 역할과 정책방향. 한국개발연구원. p.66.
2) 이혜정(2019). IB를 말한다. 창비교육. p.37. 표는 한국대학신문에서 재인용.
3) 홍세화(2020). 결: 거침에 대하여. 한겨레출판. pp.106~107.
4) 홍세화(2020). 위의 책. p.106.
5) 목수정(2018).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생각정원. p.403.
6) 김은영(2014). 영국 교육은 무너지지 않았다. 좋은땅. p.144.
7) 박성숙(2015). 독일 교육 이야기 두 번째. 21세기북스.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