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머릿 속에서 생각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인데, 잔소리가 심해서 내가 '할머니'라고 별명을 지어준 친구이다. 같은 읍내에 살더라도 일부러 약속하지 않으면 이제 만나기 쉽지 않은 게 친구 사이다. 시댁 식구들보다 더 만나기 힘든 사이가 된다. 결혼 후 각자의 생활에 집중하다 보니 그렇다.
우리 집이 바로 초등학교 앞이어서 그 친구의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등하교 시간에 스치듯 마주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이가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그런 행운마저 사라졌다.
오늘은 갑자기 연락을 꼭 해봐야겠다 싶어서 톡을 보냈다.
한참 뒤 확인할 줄 알았는데 바로 확인한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잠깐이라도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여전한 그 목소리...
나는 이렇게 익숙한 것이 좋다.
"○○아, 바쁘나?"
"아녀 나, 지금 마트 왔어~"
"그래? 어느 마트야?"
친구가 갈만한 마트는 그 친구의 동선을 생각할 때 딱 두 곳이다. 뻔한 작은 시골 동네에 우린 살고 있다.
"나, ♤♤마트"
"그래? 나도 마악 운동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지금 잠깐 얼굴 볼까?"
"좋아~!"
난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집안으로 다시 들어와 시장 보는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왔다. 운동 후 ♤♤마트에 가려했었는데 순서를 살짝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친구가 마트에서 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호등 횡단보도를 건너고 마트로 돌아가는 길을 딱 돌았는데 친구가 마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너무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그냥 기분 좋은 행동들이 자연스레 나왔다. 친구 손을 잡으려는데 친구가 손을 피한다. 금방 화장실 다녀와 손에 물이 묻었다는 이유였다.
우린 마트로 들어가 서로 살 것을 간단히 샀다. 친구는 그간 몸이 안 좋아 병원 다닌 이야기와 치매로 고생하시던 시어머님 돌아가신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카카오스토리에 소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나... 생각했었단다. 날 궁금해하긴 했었구나... 고마웠다.
친구는 오전에 언니의 식당 일을 도와주느라 바쁘단다. 난 오전이 한가하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다. 이렇게 번개로라도 얼굴을 보니 좋았다.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앉아있던 동창 모임에서의 만남과는 결이 달랐다. 난 지난번 동창 모임(총무를 맡고 있는 친구가 자꾸 나오라고 해서 나간 적이 있다)에 다녀온 뒤 조금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내가 관심 있거나 계속된 관계 속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대화들은 아니었기에 무언가 허기짐을 느꼈었다.
잠깐의 마트 데이트가 내겐 훨씬 더 큰 충족감을 줬다. 내가 가지랑 같이 볶을 잡채용 돼지고기를 두 팩 집어 드니, 고기를 왜 그리 많이 사느냐고 '특유의 참견'을 한다. 다른 이가 했더라면 무슨 참견이야 라고 했을 테지만 내 친구 ○○이는 늘 그래 왔듯이 그 참.견.마.저. 정.겹.다. 각자 살 것을 사고 마트를 나올 때 우린 손을 잡고 걸었다.
오래된 것들에는 향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익숙함이라고 부른다. 익숙함 속에서는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또한 낮추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여도 아무렇지 않으니 좋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포함한다. 그래서 오랜 친구가 좋은가 보다. 오늘 아침 난 그 익숙함으로 머리가 맑아졌다. 기분도 상쾌해졌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가끔의 만남에는 이런 설렘이 숨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