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가족의 원칙
10년 전 난 결혼을 위해서 회사를 옮겼다.
아내와 나는 도쿄에서 만났다. 아내는 교사 생활을 하다가 잠시 일본어를 배우러 왔었다. 첫눈에 “이 여자랑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약 10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했다. 그리고 접대와 회식이 많은 일본의 종합상사에서 정시퇴근이 보장된 노르웨이 회사로 이직했다. 아내가 일본어에 서툴고 도쿄에 친구가 별로 없어 함께 있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신입교육(부장님은 이를 ‘즐거운 세뇌교육이라고 했다)을 위해 난생처음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에 발을 디뎠다. 대부분 원목과 노출 콘크리트 구조로 이루어진 공항이 북유럽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것, 사람들 키가 많이 크다는 것,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는 것, 그리고 어딜 가든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 오슬로의 첫인상이었다.
교육 기간은 약 일주일이었다. 초반에는 본사에서 회사의 비전과 역사, 회사의 원칙과 비즈니스 시스템을 배우고 그 방식에 관해 토론했다. 제품설명, 기대이익, 경쟁업체 등을 주로 들려줬던 기존의 회사와 달리 이 회사는 회사의 비전과 원칙을 이해시키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사내 코치는 말끝마다 “너의 가정에 원칙이 있듯이 회사에도 원칙이 있고, 너의 가정에 역할이 있듯이 회사에는 역할이 있다.”고 습관처럼 말했다. 당시 나는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칙’이나 ‘비전’이 가정과 무슨 관계냐고 혼자 생각했다.
본사 교육이 끝나고 나서는 공장 몇 군데를 방문해 생산되는 제품의 공정이나 관리에 대해 공부했다. 인상적인 것은 공장에 갈 때마다 첫 시간에는 회사의 비전과 공장의 비전 그리고 회사의 원칙이 어떻게 해당 공장의 생산라인에 적용되고 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공장 연수까지 마칠 때가 되니 우리 회사의 비전과 원칙이 무엇인지 그리고 직원들이 그 비전과 원칙 아래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말 그대로 세뇌되고 있었다.
출장 마지막 날 밤, 다시 본사가 있는 오슬로로 돌아온 나는 사내 지도 코치와 함께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궁금했지만 연수중이라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코치님 가정에는 명확한 비전과 행동원칙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아주 명확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자신만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밤의 대화는 내 결혼 생활의 첫 번째 단추를 성공적으로 맞추어 주었다. 나는 우리 가정의 비전과 원칙에 대해 생각했다. 출장에서 다녀와 나는 아내와 함께 가훈을 정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우리는 꼭 실천 가능하고 구체적이면 좋겠다고 합의했다. 그 결과 가훈은 “사랑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 그 사랑과 행복을 전하는 가정이 되자.”로 정했다. 별거 아니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와 아내는 이날 이후 가훈을 열심히 지키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토요일마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과 봉사활동을 다니는 이 모든 일이 가훈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결혼한 지 9년째인 지금은 부부싸움을 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초기에는 아내와 이것저것 갈등을 겪었다. 30여 년을 남으로 살다가 함께 살려고 하니 그 시간이 쉬울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결혼 후 1년 만에 일본에서 첫아이를 출산하면서, 초보 부부가 겪어 내야 했던 좌충우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동시에 나만 믿고 일본에 남은 아내에 대한 책임감에 어깨가 많이 무겁다고 느꼈다. 때로는 삶이 벅차서 회사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상담을 청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참 많이 울고 웃었던 시간이었다. 이때 아내와 약속한 우리 가족의 비전과 원칙은 아내와 둘만 보내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고 온전히 우리 두 사람에 집중하게 해주었다. 곧이어 육아까지 해내면서 우리 두 사람은 가정의 뿌리를 든든히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는 구체적인 가정 원칙으로 현재 우리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비즈니스 시스템을 모방한 E의 행동 시스템(여권상 내 성은 ‘LEE’가 아닌 ‘E’로 사용하고 있어서다.)을 적용하고 있다.
1) 가족의 행동과 시간을 필요한 것을 위해 사용할 것.
–아빠의 행동이 가족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가정의 비전 혹은 아빠의 비전에 꼭 필요한 시간인지 점검한다.
2) 가족 각자의 권한을 부여할 것.
-분기별 1회씩 가족 이사회를 실시한다.
-엄마는 이사회의 의장이자 재무를 담당한다.(Chairman, CFO)
-아빠는 운영 책임자이자 대외 협력을 담당한다.(CEO, CCO)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노조위원장이자 기획을 담당한다.(Union chairperson)
-네 살 쌍둥이 아들들은 노조원이며, 직함은 아직 없다. 직함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받게 될 예정이다.
3) 돈, 시간, 교육 등에 있어 불필요한 낭비를 제거할 것.
-아이들의 사교육 필요성을 따져보고 부모의 시간과 능력을 투여한다. 그 결과 영어는 아빠가, 수학은 엄마가 전담해 교육하고 있다.
-부부간의 지출 및 시간을 상시 점검한다.
-큰 지출이 필요한 경우 이사회에서 승인을 받는다.
4) 프로세스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것.
-정기적으로 가족의 활동을 점검하고 지속적인 개선을 도모한다.
-분기별 1회 이사회 진행, 해야 할 일 목록 작성, 학습 방향 논의.
-주간 일정을 냉장고에 붙여두어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