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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Sep 04. 2019

[박화영] '여성'이 될 수 없는 '여성'의 생존기

공고한 젠더질서와 청소녀들의 생존방식


시작부터 끝까지 생생한 충격으로 가득했다.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거친 현실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영화 박화영은 공고한 젠더질서와 위계 안에서 '여성'이 되지 못한 박화영의 생존기를 그려낸다.


냉혹한 먹이사슬과 젠더위계

안전망이 없는 거친 세계에서 생존은 타인에 대한 폭력의 질서 속에서 확보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의 '강함'을 증명해야 한다. 남성들에게 이 '강함'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거친 태도와 그렇기에 무슨 짓도 할 수 있다는 폭력성으로 구성된다. 반면 여성들의 생존은 성적거래로 확보된다. 가장 높은 위계에 올라있는 남성의 연인이 되는 것. 그의 연인이 될 수 있을만큼 완성된 '여성'이 되는 것.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영재와 원치않는 섹스를 하고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미정은 영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세진은 영재와의 관계를 통해 영재의 손을 빌러 박화영을 응징한다.


이런 냉혹한 질서는 그들이 속해있던 세상에서 학습된 것이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그들의 세계는 역설적으로 철저한 젠더수행과 위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가출 청소녀들과의 섹스를 욕망하는 어른남성들이 존재하기에 이런 남성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전략이 고안될 수 있었다. 여성의 몸을 쉬운 거래대상으로 만들어온 현실은 청소녀들이 자신의 신체를 너무나 쉽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세상 속 질서를 너무나 명확하게 인지한 그들은 가해와 피해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활용하며 오히려 이를 교란한다.



'엄마 박화영'의 의미

예쁜 외모도, 남성만큼의 권력도 갖지 못한 박화영이 살아남는 법은 엄마가 되는 것이다. 공간을 제공하고, 식사를 제공하고, 온갖 뒤치다꺼리를 담당하는. 박화영은 그렇게 증오하던 엄마가 되어 역설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집단에 소속되고자 한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뻔봤냐?!"라는 박화영의 반복적인 대사는 그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박화영의 욕망이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박화영이 '엄마'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여성'이 아닌 '엄마 박화영'은 영원히 그 집단에 속할 수 없다. 그저 그 위계의 가장 말단부 언저리에서 끊임없이 이용당할 뿐이다.


나아가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끝없는 폭력을 가해야 하는 이 먹이사슬은 그 존재 자체가 위태롭다. '여성'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여성'들과의 경쟁을 감내해야 하며, 남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은 먹이사슬의 최하위 배치된다. 남성들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들의 먹이사슬 속 철저한 위계는 이 집단이 '강한 남성'과 '예쁜 여성'이라는 젠더를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유지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엄마 박화영'과 미정의 관계

미정에게 엄마 화영은 절대적인 믿음과 애정을 보인다. 박화영이 받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은 박화영이 '엄마'가 되면서 미정을 향한 맹목적인 희생과 애정으로 표출된다. 이 둘의 관계는 '우정'이라기 보다는 마치 절대적인 모성신화를 상징하는 '모녀관계'로 그려진다. <박화영>의 결말은 엄마 화영의 절대 적인 희생을 불편할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 엄마 화영은 영원히 그들과 가족이 되지 못한 채 공고하고 거친 그 피라미드의 끝에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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