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토리 Sep 11. 2019

[죽여주는 여자] 죽음마저 의탁하는 남성들에 대하여

가장 소외된 존재가 보여주는 인간다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여성 혹은 납치 및 감금으로 팔려간 여성들로 상상되고, 이러한 여성들의 잔상 또한 '젊은 여성'으로 그려지기 일수다. 나이 든 여성이 실제로 성을 판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우스운 일, 즉 수요없는 육체로 평가된다. 이때 등장한 '박카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나이 든 육체로 성매매를 유지하는 특수한 그래서 충격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의는 모두 '젊어서 몸 팔면 늙어서도 몸을 팔게 된다'와 같이 다시 여성들을 비난하는 기제로 연결된다. 여성의 몸 그 자체가 팔리기 위한 상품으로 평가되는 현실과 성적 거래를 너무나 쉽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없다. 그저 ' 나이 든 가치 없는 육체'로 성을 판다며 불쾌해할 뿐이다.



<죽여주는 여자>는 자극적이고 단선적인 시선으로 노인들의 욕망과 성적 거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얽히고 설킨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함께 조망하고 그려낸다. 수많은 사연과 삶에 대해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존재의 다양한 이면들을 그려낼 뿐이다. 따라서 소외된 노인들 중에서도 죽음을 의탁할 수 있는 존재와 자신에게 의탁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삶과 인간다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함께 다룬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죽음마저 의탁하는 남성들과 사회의 가장 열악하고 소외된 위치에서 모든 책임을 짊어진 채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존재를 포착한다.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해결하는 '죽여주는' 여자


늙는다는 것은 모든 욕망을 거세당한 존재로 읽히는 것이다. 우리는 늙은 육체의 섹스를 상상하지 못한다. 아니 상상하지 않는다. 성적 욕망은 젊은 육체에만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런 노인들의 곁에 소영은 억압된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죽여주는 스킬'로 해결해주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소외된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소외된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다룰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욕구조차 해결될 수 없는 남성들에 대한 연민의 목소리만 남는다. 이때 단 삼만원으로 남성들의 욕구를 해결해주는 소영은 그들의 구원자인 동시에 윤리적 문제와 죄의식을 떠넘길 수 있는 약자이기도 하다. 성을 파는 소영에게는 '박카스 할머니'라는 호명이 붙지만 이를 구매하는 노인들에게는 아무런 호명도 붙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은 모두 '박카스 할머니'로 명명된 소영에게 돌아간다. 이때 모텔방에서 소영과 거래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장면들은 성매매를 '쉬운 노동'으로, 성매매에 오고가는 돈을 '쉬운 돈'으로 고정하는 관념들에 도전한다.



죽음까지 의탁한 남성들과 모든 짐을 짊어진 여성


소영의 고객 중 하나였던 재우는 소영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치매에 걸려 혼자 남은 노인, 부유한 아들과 그 가족을 두었지만 요양원에 방치된 노인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 다 소외된 채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해가는 노인들이었고, 소영은 이러한 노인들의 사연을 통해 '죽임'을 수행한다.


성적 욕망을 소영에게 분출해왔던 남성들은 이제 죽음마저 소영에게 의탁한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고 남겨진 소영의 삶에 대한 배려는 없다. '소외된' 자신들의 처지와 사연을 소영이 이해하길 바라지만 그 누구도 남겨진 소영의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한 재우조차 절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자신의 친구들을 직접 죽이지 않았기에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죽은 자신의 옆에 남겨질 소영의 삶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도 않는다.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는 그의 말에 소영은 들어가지 않는다. 소영은 철저히 '우리'에 배재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재우가 남긴 돈을 헌납하고 함께 거주하는 식구들과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소영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따라서 누구보다도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사연을 포용한 채 대신 죽음을 실행해준 소영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든 흔적이 지워진 채 세상과 작별한다.



'죽여주는 여성'이 보여준 인간다움


죽여주는 여자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는다. 죽여주는 스킬로 그들의 성적 욕망을 해소해주는 여성, 그리고 죽음까지도 해결해주는 죽여주는 여성. 따라서 소영은 남성들이 분출해놓은 모든 욕구와 그들이 버리고 떠난 모든 책임감을 짊어지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소외되고 열악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영화 초반 자신의 모든 책임을 버리고 도주한 의사를 찾아온 필리핀 여성은 자신보다 약자에 위치한 존재들에게 모든 책임과 삶의 무게를 떠맡기는 또 다른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 필리핀 여성의 아들을 보살펴주는 소영은 남성들이 버린 책임을 다시 짊어진다. 이미 소영은 미군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 보내야 했던 그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간다. 그때의 미군도, 현재의 남성 의사도 모두 욕구를 분출하기만 했을 뿐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소영에게 남겨진 '책임'들은 궁극적으로 소영이 사회의 온갖 오물들을 해결해야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우며 열악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멸시해왔던 이 소외된 존재가 보여주는 인간다움에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단선적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사회에서 소외된 채 죽음마저 의탁해야 하는 노인들의 삶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소외된 자들이 던지고간 온갖 책임 속에 남겨진 소영의 삶에 집중한다면 자신들의 성적 욕구와 삶, 죽음 그 모든 것을 여성들에게 의탁하는 남성들의 존재가 선명해진다. 가장 멸시받는 자에게 모든 죄의식과 책임을 맡겨버린 존재들. 그리고 이러한 짐을 짊어진 한 여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화영] '여성'이 될 수 없는 '여성'의 생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