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사이 못난 사수가 되어가는 중이다
갑자기 R사의 제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안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제안을 시작할 때, S매니저님이 미팅을 다녀오셨다. S매니저님을 잠깐 소개하자면, 정리를 정말 잘하시고,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해내는. 내가 닮고 싶은 매니저님이다.
팀 내에서 부사수가 함께 제안을 작성하기로 되어 있었고, 제안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부사수와 타 프로젝트가 워킹그룹으로 묶여 있는 것들이 많아, 업무 차원에서 제안 작성을 포기하자 마음먹었다. 팀장님께도, 매니저님께도 말씀드렸다. C 프로젝트의 업무 롤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저는 제안을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이 의견 내일 말해보자~라는 말과 함께 넘어갔고 다음날 나는 제안 방에 초대받았다.
이런 과정을 배워버린 탓일까, 지쳐버린 탓일까. 불평하지도 의문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제안에 참여했다. 제안은 재미있었다. 고객사가 마음을 바꿔 진행하지 않게 되었지만. 허탈하지만 재미있었고, 배움도 많아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이 시기의 업무량은 100%를 훨씬 넘었다. 나도 버겁게 일을 하고 있는데 부사수는 오죽했을까. 업무 도중, 부사수가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매니저님, 제가 너무 느려서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조금만 더 잘했어도..'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든 사고가 멈췄다. 내가 업무를 더 빠르게, 잘, 정확하게 했어야 했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부사수의 부담을 덜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기 전에 먼저 케어를 해 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관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을 굉장히 잘하고, 주체적이고, 열정도 있는 부사수를 내가 망친 것 같았다. 내가 사람을 져버릴 정도로 일에 빠진 것은 아닌가?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이 무책임하다고 욕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가장 무책임했던 건 나였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가장 화가 났다. 내가 너무 무능력한 순간이었다. 물론, 그 순간 부사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라는 이야기뿐. 나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부사수의 직무 인터뷰가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다. '매니저님, 저 직무 인터뷰 나왔어요! 자랑하고 싶어요'라며 부사수가 보내준 인터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제목이 있었다.
'최고의 복지는 사수다'
너무 힘든 10월을 지나고 있는 그 순간,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일도 사람도 잘 챙기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너무 과분했다. 부사수에게는 고맙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했다. 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수가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6개월이 지나면 퇴사할 인턴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6개월을 함께 지내는 인턴이지만, 우리와 같은 정규직들에게는 N번째 인턴이지만, 이 친구에게는 6개월을 통해 업에 대한 가치관이 바뀔 수도, 이후 다른 회사에 입사하여 부사수를 받았을 때 대하는 태도가 변화할 수도, 기업에 대한 생각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고연차와 같은 생각 -예를 들면, 6개월 뒤에 나갈 사람이니 정을 많이 주지 않는, 굳이 특별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시키는 일만 하게 하는- 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저 연차만의 특권이 아닐까. 남은 2개월, 어떤 사수가 되면 좋을지 많은 생각이 드는 시기이다.
※ 해당 글은 2020년에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