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듬지 않은 글을 발행하는 무모함을
- 술을 먹고 한 잔이 부족한 날. 허기진 날에는 분식집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지
- 마음이 허해서 치킨을 시켰어. 다음 날 생각해 보니 너무 아까운 돈이었어
가까웠던 Y의 습관 중 하나다. 술을 먹고 난 후 배가 불러 집에 가기 급급했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왜 한 잔이 부족한 건지, 왜 배가 부른데 돈을 쓰는지, 배 부른 배를 더 배부르게 만드는지.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온갖 물음표를 짓게 했던 행동이었다.
2022년 첫 실행인 O프로젝트가 내일부터 실행된다. 이런저런 일도 많았지만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작년에 진행한 A 프로젝트보다 나은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실행 전날, 이제 다 왔는데 왜 이렇게 싱숭생숭한지. 이 마음이 실행 전에 뭘 빼먹지는 않았을까,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으레 오는 불안함이라 생각했고, '뭔가 빠진 것 같아!'라는 말을 퇴근 전까지 달고 살았다.
퇴근 후, 회사 문을 넘으며 깨달았다. 이 감정.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니 제법 당황스럽다.
- 아, 이 공허함.
대학교 때의 나는 퍽 성실했다. 강의실 NPC라고 불릴 정도로 강의실에서 떠나지 않고 노력했으며, 너는 언제 잠을 자니-라는 말을 들어오면서 최고가 되고 싶어 했던. 그러면서 노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학생이었다. 진로를 결정할 때, 어영이는 디자인 계속할 거지?라는 물음을 수없이 들어왔던 나였고 많은 고민을 했지만, 이 고민을 한 번에 없애버린 순간이 있었다.
졸업전시 마지막 컨펌 전, 여느 때와 같이 마지막의 마지막 수정을 거쳐 집으로 가는 동이 트는 시간. 이제는 다 끝났다, 수정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마지막 컨펌까지 두어 시간이 채 남지 않은 하굣길. 이 마지막 순간을 몇 달 동안 그려 왔던 나의 모습은 후련함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 긴 시간을 견뎌온 나에 대한 뿌듯함, 그리고 같은 것에 대한 수정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아쉬운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이 감정의 평행선 사이 아무것도 없는 진공 같은 감정이었다. 적게는 1년, 길게 본다면 5년을 달려온 시점에 있는 것. 아무것도 없는 것. 한참을 뭔지 모를 없음에 펑펑 울었던 것 같다. 한참을 펑펑 울다, 뭔지도 모르는 것에 울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디자인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끝까지 한 노력의 한계가 아닐지.
졸업 전시가 끝나고, 친하게 지내던 동기들에게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 나 사실은 그날 집 가서 혼자 엄청 울었다?
모두가 깔깔 웃을 줄만 알았던 그 이야기에 다들 심각해졌다. '진짜?', '전혀 몰랐어', '네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졸업 전시 내내 후배들을 도와주고 동기 들와 함께 있어주고 힘든 이야기를 들어줬던 나라서. 그중에서도 멘털이 제법 강했던 나라서 그랬나 보다.
- 응. 완전 집 가서 울다가 잠도 못 자고 씻고 왔잖아 나. 씻고 왔는데 C는 지각해서 나한테 프린트해달라고 했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대답과 웃음. 이 말을 우스갯소리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충격을 받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뭔지 모르겠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인부터 없애버리자는 심보로 디자인은 이제 절대 금지- 라는 정리를 통해 끊어낸 안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회사 면접을 볼 때, 가장 힘든 일을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하면, 어느 면접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이야기였지만 항상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하지 못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어서. 그리고 자세히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서.
이제는 정말 조금 알 것 같다.
- 아, 이 뭔지 모를 공허함. 지금 내가 괜찮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구나.
다 괜찮다, 이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것은 아니었나. 나를 세뇌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나를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무엇인가를 포기하게 하는 그때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온 것일까. 다시 그 순간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문득 다시 찾아온 이 공허함을 어떻게 채워 볼까 고민하던 나는 허기짐을 느끼고 집에 돌아와 라면과 콜라,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꺼내 먹고도 부족한 마음을 채워 보려 나초와 치즈 소스를 검색했다. 가장 쉬운 것들로 메꾸어 보려는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고 겉돌기만 한다.
Y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해서 공허함이 채워졌는지.
그리고 나에게 묻고 싶다. 얼마나 더 공허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