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잘 몰랐다.
왜 명절이 지나면 이혼률이 증가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듣기 싫은 말이 순위별로 나열되는지.
난 명절이 여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생일보다도 신났다. 할머니가 직접 빚어주시는 만두를 먹고, 새우 튀김으로 입가에 기름칠을 한 채 머털도사나 아기공룡 둘리를 보는 건 정말 환상적인 루틴이었다. 내가 할 일이라곤 사촌 형제들과 침대 위를 방방 뛰고 삼촌이 용돈을 꺼내주실때 쯤 괜히 딴청을 부리다 "헤엑! 아, 감사합니다."하고 용돈을 받아 챙기는 게 전부였다.
학생 때까지도 괜찮았다.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었으니, "너 학교에서 몇 등하냐.", "어느 대학이 목표냐." 하는 듣기 싫은 질문 top3 질문에도 나름 당당했다.
명절이 고단해진 건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부터였다.
그 즈음에야 드디어 철이 들었고, 혼자 부엌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가 보였다. 명절 전에 본가에 내려가면 방바닥에 달력을 몇 장 깔아놓고 눌러 앉아, 엄마가 하란대로 생선을 굽고 빈대떡을 뒤집었다. 튀김은 내 능력 밖이어서 엄마는 앉을 틈이 없었다.
몇 년 전엔, 드디어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할머니의 허락이 떨어졌다. 명절 전에 전통시장에 가서 문어와 제수용 과일을 사는 일은 끝이 났다. 그러나 엄마는 습관처럼 튀김 몇 가지를 준비했다. 이제 음식 하지 말고 쉬란 말에, 엄마는 "그래도 명절이잖아."라고 대답하셨다. 어쨌거나, 전쟁같던 음식 준비가 없어진 명절은 다시 살만해졌다. 적당히 누워서 명절특선영화를 보고, 친척들과 밥 한 끼 하는 날이 된거다.
그러나 명절이 편한 날이라는 착각은 작년 추석에 완전히 깨졌다.
조카의 맹활약 덕분이다.
사촌동생이 엄마가 되었다. 5촌 관계인 조카가 생긴 거다. 몇 년 전에 누워서 바둥거리는 걸 본 거 같은데, 어느새 네 살이 되어 나타났다. 그 애는 날 보자마자 우렁차게 외쳤다.
"누나!"
"뭐? 누나가 아니고 이모야. 이-모."
"이모?"
"응. 이-모-."
그 애는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서서 다시 외쳤다.
"누나!"
나는 그 애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누나란 소리를 듣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난 이를 악물고 호칭을 서른 다섯 번 쯤 수정해주었고, 그 애는 마흔 번 쯤 틀렸다. 그 애의 승리였다.
조카는 바나나를 까서 딱 두 입씩 먹고 아무데나 버려두었고, 우리 집 고양이를 맹렬히 쫓아 다녔으며 화분마다 말을 걸면서 물을 주었다. 나는 정말, 네 살이 그렇게 말이 많단 걸 처음 알았다. 그 날 우리 집엔 어른이 여섯 명 있었는데, 최후의 직립인간은 그 애였다. 육아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4개월 짜리 아기가 걷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은 널리 퍼졌으나 왜 네 살짜리 아이가 앉는 법을 모른다는 정보는 아무도 안 알려줬단 말인가. 불행히도 내 몸뚱이는 4개월 짜리 아기에 더 가까웠으므로 난 그 애의 에너지에 맞춰 놀아줄 기력이 없었다. 그 애가 우리 집 고양이의 낚시대를 기어코 박살냈을 때에도, 난 그저 누워서 "그마안..."을 외치는 게 전부였다.
조카에게서 벗어난건, 우리가 각자 다른 차를 타면서부터다. 우린 각자 차를 타고서 요양병원에 계신 친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병원 벽면엔 익숙한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내가 미술 시간에 초등학생 아이들과 만들었던 에버 알머슨 작품이다. 할머니, 할어버지들의 작품이었다. 카메라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표정도, 생신을 맞이해 어설픈 왕관을 쓰고 찍은 사진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졌다. 다시 걷는 법을 잊은 할머니의 머리색과 피부색, 눈동자 색은 어느새 비슷해져있었다. 병원복이라도 좀 알록달록하면 좋겠다 싶을만큼,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하얗고 뿌연 곳이었다.
짧은 병문안 후엔 외갓댁으로 갔다. 혼자 사시는 외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친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서도,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를 보면서도 느낀다. 사람은 원래 점점 어려진다. 걷다가, 뛰다가, 다시 앉아 있다가 누워있고, 인내하지 못하다가, 인내를 배운 후 다시 인내를 잃어버리고, 많이 웃다가 웃지 않다가 다시 많이 웃는다. 산다는 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오는 단 한 번의 진자운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외할머니께 샤인머스캣을 드렸다.
"할머니! 포도 좀 드세요."
할머니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시면서, "으응, 난 괜찮으니 너 많이 먹어."하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난 포도알을 하나 집어들고, "에이, 맛있으니 좀 드세요." 라는 말을 남긴 채 주방으로 갔다. 그런데 주방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테이블 위에 두었던 포도가 사라진거다.
그것도 접시째.
"어?"
그때 이모가 소곤소곤 말씀하셨다.
“세이야, 할머니 포도 숨겨놓으신 것 좀 봐라.”
먹지 않아도 괜찮다던 포도를, 할머니는 접시째 좌식테이블 아래쪽 구석에 숨겨놓으신 거였다.
“헥, 드시고 싶으셨나봐.”
“그러니까. 자꾸 먹을 걸 숨기시네, 애처럼.”
할머니는 메론도, 과자도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그 모든 것들은 테이블 아래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할머니는 다시 아이가 된 것처럼 먹을거리를 자꾸 숨기셨다. 그럼에도 자식 앞에선 닭다리도 자장면도 일단 싫다고 고개를 젓던 기억이 본능만큼 깊게 남은 것 같았다. 왜인지 좋았다. 드디어 먹고 싶은 걸 챙기기 시작한 할머니가.
“할머니, 식사하셔야죠. 식사 하셨어요?”
“난 밥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
할머니는 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의 처지를 아시는지 자꾸 멋쩍게 말씀하셨다. 난 할머니가 거꾸로 쥔 젓가락을 바로 쥐어드리고, 두유에 빨대를 꽂아드렸고, 엄마는 할머니를 구석구석 씻겨 드렸다.
“아유, 어마이 씻어놓으니 예쁘네! 피부가 뽀송뽀송하니 얼마나 좋노!”
“뭐가 이쁘노! 피부가 이래이래 해가지고 되겠나!”
할머니는 뭐가 좋으신지 꺄르르 웃었다. 난 할머니가 그렇게 크게 웃으시는 걸 처음 봤다. 술에 거하게 취하신 아빠는 할머니랑 말이 엄청 잘 통했다. 우리 가족은 술취한 아빠과 대화를 포기했으나 할머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위의 말에 대꾸해주셨다.
떠들고 취하고, 부산한 하루를 보낸 다음날
엄마는 할머니의 집과 마당을 몽땅 청소했다. 할머니는 그동안 문 뒤에 서서 셋째 딸이 바쁘게 청소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한참을, 가만히.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씀하셨다.
“너네 할머니가 많이 웃어서 좋아.”
“응?”
“엄마 어렸을 때 할머니가 웃는 모습을 잘 못 봤거든. 근데 치매 걸리고 나선 감정이 오락가락하는지, 가끔 엄청 신나서 크게 웃어. 소녀 같으셔.”
엄마는 목욕을 하고 깔깔 웃으시던 할머니가 떠오르셨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손주인 나를 진작에 잊으셨고, 딸도 조금씩 잊어가신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갑게 할머니를 챙기는 첫째 아들만 기억한다. 그건 섭섭하지 않을까.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들수록 어려져간대도, 엄마가 나를 잊는다는 걸, 나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늘 비슷하던 명절이었는데, 작년 추석은 왜 그렇게 버거웠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없던 조카가 날 졸졸 따라다니고, 할머니의 기억은 시시때때로 증발한다. 겉도 속도 하얘져만 간다.
사는 게 바빠 1년에 한 두 번 친척들을 보는 사이, 세대는 겅충거리며 지나가고 난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갈까봐 자꾸만 목구멍이 울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