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향제비나비가 살아가는 법
언제부터였던 걸까. 요즘 노래에 푹 빠져 괜히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바라본다. 나의 기억회로는 마치 녹쓸은 레일처럼 허전했고 넋나간 시절인연처럼 가물가물 했다. 처음엔 그져 무지했고 심한 이질감마져도 느꼈었다. 웬지 낮설게만 느껴졌던 난, 지금의 동질감을 되찾기까진 꽤오랜 시간도 소요됐다. 어느날, 세면대위 거울속에 비추인 잔뜩 초췌해진 내 모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적도 여러번.
난, 원래 이렇게 센치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없던 내 안의 감성들이 어떻게 내 마음속에 새로이 생겨나게 된 것인지. 지난했던 세월 때문이었을까. 야심한 새벽녘. 한동안 애꿎은 천장만 물끄러미 쳐다보다 아지트를 무겁게 감싸고 있는 공기들과 대치가 계속된다. 그리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도 흘렀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누워 있었지만 난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날 필요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직 갈데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혼자인데 난 정말 괜찮은 걸까. 어찌됐든 떠나는게 좋치 않을지 싶어 몇 번의 고심끝에 겨우 움지여주기로 마음먹고 잔뜩 무거워진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삶의 루틴처럼 굳어져 버린 이 황당 시츄에이션. 이윽고 세면대위 거울속에 비추인 나와도 마주한다. 거울속의 그는 진정 내가 맞는걸까. 이어 허망함들이 금새 날 에워싼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무미건조한 일상속에서 잠시 삶의 의미와 방향감을 잃어버린 듯한 나. 일과 쉼. 일상과 휴식. 달림과 멈춤 사이의 간극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 뿐이다. 지금의 나에게 쾌도난마란게 존재할 순 없는 건지.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난 배낭하나 짊어지고 무조건 어디로든 떠나주어야 했다. 살기위해서이자, 무거워진 마음 내려놓기 위해서랄까.
그러다 보면, 가끔 반전이란 걸 기대할수도 있는 것이니. 숲길에 육신을 반쯤 맡긴채 무심으로 걷다보면 어느새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은 나와 마주할때도 있는 것이니. 고작 내려놓기위해서 걸었던 것 뿐이었는데 어느새 뭔가로 가득 채워진 마음들과 마주한다. 그져 자연의 소리에 이끌려 걷다보니 행복이 한웅큼 채워져 있었던 것. 걷다가 플레이리스트에서 나만의 멜로디가 흘러 나왔을때의 이 황홀함과 편안함은 예상치못한 횡재임에 틀림없다.
난, 주로 조용한 발라드풍의 노래들을 좋아한다. 또한, 갈수록 중독성 강한 뭔가에 푹 빠져있는 듯한 이 묘한 감정과도 마주하며 그 간극이 갈수록 짧아진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후엔 고무줄처럼 다시금 본래의 본질로 되돌아 오기도 하지만 그게 휘발성이 강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잠자는 시간이나 근무시간 빼놓고는 거의 매일 그 루틴들에 포로가 되어 지낸다. 조각난 그 찰나의 시간들을 한올 한올 이어 붙인다면 하루에도 족히 몇 시간은 거뜬히 넘을수도.
이어폰끼고 들을 때도 있지만 가끔씩 홀로 있을 때는 생음악으로 듣는게 최고다. 무심히 듣다보면 이따금씩 삶의 청량제가 되어 주기도하니 굳이 애써 치유의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처럼 일상에서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렸을 땐 난, 가차없이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곧 떠나는 이유이자 나의 순수한 바램이다. 그 순간 노랫가락은 필수적.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애마를 어디론가를 향해 몰아갔다.
목적은 단 하나, 외로움에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나의 간절한 몸부림이자 이름모를 야생화와 교감도하고 꾸물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라도 나눠주기 위해서이다. 도착한 고모리 호수공원은 어느덧 여름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에선 자외선들이 무자비한 공격을 해대고 오늘도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잔잔히 출렁거리는 호숫가 수면 위. 뜨겁게 달궈진 바람들은 나무 잎새들을 간지럽게 어루만져 주던 오전 무렵이었다.
한적한 호수공원을 걷고 있던 도중 새삼스럽게 노래에 심취해 있는 나와 마주한다. 순간, 아무런 이유조차도 없었는데 가슴이 괜시리 울렁거렸다. 태양볕 때문인지 잎새에 이는 바람때문이었는지. 호랑나비, 배추흰나미 공중을 활공했고 매미들도 이곳저곳 나무 줄기에 허물들을 잔뜩 벗어놓았다. 자신들의 출현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려는 무언의 메시지같았다.
산책 중 난, 갑자기 호주머니속을 뒤졌는데 이어폰이 없다는 걸 알았다. 손끝이 멍했고 순간 당황했다. 후폭풍도 거셌다. 상상 이상이었다. 황당, 자아상실, 유체이탈. 어쩔수없이 다시금 애마로 향했다. 고독한 사냥꾼, 못말리는 노래사랑이다. 이건 진심이다. 노래가 나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니 어쩌지도, 말릴수도 없다. 이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식사할때도, 카페에서 지인들과 차한잔 나눌때에도. 오늘처럼 자연과 함께 숲속 한적한 곳을 걸을 때에도, 심지어는 밤에 취침할때에도 노래의 위로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노래와 산책. 좋은점을 대자면 지면을 채우기조차 버겁다. 무엇보다 내적으로 심적안정을 주어서 좋고, 또 끝없는 잡념과의 줄다리기를 멈추게 해줘서 좋다.
이어폰을 기고 조금씩 입으로 흥얼거리면서 걷는다. 모든게 나 홀로이기에 가능한 일. 특별한 목적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굳이 바램이 하나 있다면 우울에 휘둘리지 않고 무심으로 걷다가 예기치 않게 나비 애벌레 한 두마리와 조우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행복할 듯 싶었다. 설사 만나지 못하더라도 좌절할 필요까지 없다. 오늘만 날인것도 아니고, 인연은 모두 때가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그져 무심코 걸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노랫가락에 의지한 채. 한걸음 한걸음 걷다보면 가금씩 의도치않게 로또에라도 당첨되는 수도 있는 것이니. 여행지에서의 시간의 속도와 삶의 농도는 회색도시의 그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내 일상들을 새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자연의 주인공들에게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흥얼거림이면 충분했다. 만약 나에게 노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오늘도 숲속을 서성이며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멍때리며, 바람때리며 걷는데 길섶에 노랑꽃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바람에 의해서 한번. 나비들 팔랑거리는 날개짓에 또 한번. 그것마져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려하는 나비들의 애절함은 마치 시공을 초월하는 삶처럼 신비 가득했다. 소슬바람 간간히 불어주는 이 곳, 새 울음소리에 맞춰 걷는데 묘하게 내 생체리듬과 맞아 떨어진다. 심지어 나뭇잎들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는 그 모습까지도.
고모리 호수공원 둘레길은 너무도 조용하고 안락했다. 무심으로 걷다가 드디어 모처럼 바라던 그 님을 만났다. 극적 반전이었다. 횡재였다. 드디어 로또에라도 당첨된듯 마음으로 들떴다. 사실 과한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그져 멍때리며 몇 걸음 걸어줬을 뿐이었데 쥐방울덩굴이 내 무덤덤한 안테나에 걸려들었던 것. 평소 내 더듬이 그물코가 쬐금 헐렁하다라고 느꼈었는데 오늘따라 별일이지 싶다. 살다보면 이렇게 용쓰지 않아도 횡재하는 날도 있는 걸 보니 세상 참으로 살만한듯 하다.
그렇다면 아무렇치 않다는 냥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법. 하이에나는 먹이를 덥석 물지 않는다 한다. 최대한 뜸을 들여가며 예비운동에 주력해 본다.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주변을 좀 더 살피면서. 혹여나 꾸물이들이 환하게 미소라도 지어주며 나 여기있어요, 라며 깜짝쇼라도 해줄 수 있으니. 그 예상은 여지없이 적중했다. 이 맛에 모든걸 내려놓고 한여름 해가 중천에 떠있는 뙤약볕에 이렇게 땀 뻘뻘 흘리며 걷는게 아닐지 싶다.
사실 꼬리명주나비 애벌레이길 조금 바라긴 했다. 하지난, 사향제비나비 애벌레. 이거라도 어디야. 모든 화의 근원은 과한 욕심이라 했으니. 동거생활을 하려면 우선 그들의 생리부터 알아내야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으니. 쥐방울덩굴의 마법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볼까나.
자연계 먹이사슬에서 사향제비나비와 꼬리명주나비는 서로 경쟁자적 위치에 있다. 쥐방울덩굴을 가지고 어떤때는 사향제비나비가. 또 어떤때는 꼬리명주나비가 똬리를 틀며 산다. 쥐방울덩굴은 희귀하게 독성물질을 분비하는 식물. 사향제비나비는 오히려 이 독성물질을 역이용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쭉 진화 되어왔다. 다른 애벌레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독성을 분해하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엿보인다.
큰 몸짓과 날개는 제비를 닮았고 수컷에서 특이한 사향 냄새를 풍긴다고해서 붙여진 이름, 사향제비나비. 어미는 이 쥐방울덩굴에 알을 낳고 그 애벌레는 그 독초를 먹고 자란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성분을 체내에 축적하게되고 오히려 이 독성분때문에 천적들이 이 애벌레들을 회피하게 되는 것. 그래서 사향제비나비 애벌레는 대놓고 노출된 상태로 지내는게 가능하나 보다.
그럼, 인간 플랫폼의 생존비법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볼까. 조그만한 미풍에도 나약하기만 하던 플랫폼. 사향제비나비 애벌레들의 삶의 비법들이 그져 부럽기만하다.
이 애벌레와 나와의 만남은 아주 극적이었다. 쥐방울덩굴 위는 온통 애벌레들의 왕국. 광대가 외줄타기하듯 열씸히 먹고 놀고 싸는데 열씸이었던 꾸물이들. 난 하마터면 정신줄 놓을 뻔했다. 호수공원은 이내 축제의 장으로 변신했고 플랫폼은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하고 보쌈하듯 모시고 왔다. 단 세마리만. 원한다면 특별 사교육까지도 시켜주겠노라고. 사실 그 교육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생겼다. 내 아지트 주변에선 쥐방울덩굴을 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 열씸히 발품팔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해 겨우 자생지 한곳을 알아내긴 했다. 비록 몇 개체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안심은 되었다. 사실 사향제비나비의 생존비법은 쥐방울덩굴의 생태와 직결되어 있다. 곳곳에 외래식물, 즉 가시박들이 번성하여 쥐방울덩굴들을 잠식해 버리고 있는 현실. 빠른 성장과 강한 번식력, 그리고 덩굴성식물이란 특수성때문에 토종식물과 농작물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외래 생태계 교란식물이다.
그는 듣던대로 완전 편식가였다. 쥐방울덩굴이 아니면 굶어 죽으면 죽었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등칡이란 식물도 있긴한데 이곳에서는 아예 구하기조차 어렵다. 진시황 정도면 몰라도. 그러던, 뜨건 여름이 지속되던 어느날 갑자기 공중부양자세를 취하더니만 전용이란게 되어 있었다. 난, 한동안 그져 넋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난 출근했다. 몸은 일터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아지트를 지키고 있었다.
기다림에 점점 지쳐갈 무렵, 퇴근해보니 드디어 변태란게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삶은 기다림이라기 보다 늘 선택하며 만들어가는 것, 이란 문장이 떠올랐다. 언제쯤 변태가 완성되나 무척 궁금해 했었는데 어느순간 사육통 벽에 실을 이리저리 뿜어 대더니만 어느새 번데기가 되어져 있었던 것. 그렇다고 모든 근심이 없어진건 결코 아니었다. 한 걱정뒤 또 한 걱정, 언제 황홀한 날개짓을 보여줄건지. 걱정대학교 출신답게 플랫폼의 머리가 하해지기 일보직전이다.
혹시 생육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면 어쩌나. 혹여 우화부전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기다림이란 뭘까. 아마도 씹다가 어느정도 말랑말랑해져버린 껌처럼 실체가 일정치도 않는 그런 묘한 파랑새같았다. 때론 설렘이나 가슴떨림이 동반되고 첫사랑에게서 기다리던 편지가 언제오나 애꿎은 우체부 아저씨만 원망의 대상이 됐던 학창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난 사과나무에서 잘 영글어진 사과가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진 않는건지.
그러는 사이, 나에게도 여름 휴가란게 선큼 다가왔다. 쉼도 필요했다. 내 마음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번데기속 꾸물이는 아직 아무런 미동조차도 없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귀뜸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어 버린지 오래. 결국 그와 난, 먼 남쪽나라로의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했다. 여차저차하여 내 애마를 타고 고향집으로 함께 가는 중 하늘은 맑고 태양의 열기는 대단했다.
하룻밤을 보내고난 다음날, 고향의 아침은 뜨겁고 폭발 직전이었다. 사육통의 안녕함을 확인하고 이내 세면대로 향한다. 세면대위 거울은 둘인듯 하나인듯 햇갈렸다. 잔뜩 긴장한 듯한 얼굴. 쭈그려진 이마. 초췌해진 눈동자가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는 나임을 알려주었다. 기다리다 지쳐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기다리는 님의 소식은 오질않고 내 마음은 목석처럼 굳어만 갔다. 거울속에 비추인건 내가 아니었다. 그 속의 얼굴은 무언가 결핍증후군에 깊이 빠져있는 듯한 그 무엇같았다.
산책을 하기위해 일찍 아지트를 나섰다. 어깨에 무거운 쇳덩이 하나를 짊어진 듯 온몸이 무거워진 채로 이웃 동구리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새들이 짹짹거리며 울어댔고 호수위엔 청둥오리들 유영하는 아침풍경이 감미로웠다. 이윽고 물속에 자라 한마리가 내 무덤덤한 더듬이에 포착되었다. 오늘 녹쓴 레이다는 마치 열몫하는 느낌이다. 목놓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제스쳐. 기다림이란 이런 걸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호수공원 수면위에 드리워진 만연산의 윤슬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빛나 보이던 그런 날이었다. 물고기들 한가로이 유영했고 공원에선 배추흰나비, 네발나비, 호랑나비들 활공중 이었다. 마침 오늘 뭔가 좋은일이 있으려나 싶어졌다. 저 물고기처럼 조만간 첫 헤엄치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호랑나비들처럼 먼 창공을 활공해 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한시간여 산책을 마쳐주고 아지트로 왔다. 땀으로 범벅이 된채로 몽유병환자처럼 또 사육통에 내 온 마음을 전했다.
순간 나의 소원이 통했던 것일까. 내 마음이 전해진듯 드디어 어떤 느낌이 왔다. 드디어 번데기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던 것. 이번 기다림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건 신의 선택이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날. 몇 분간 나와 그녀간의 놀이가 시작되었다. 아직 모델역할까지 서툴렀지만. 반쪽님과 난 마치 하늘을 나는듯 기뻐했다. 마치 행복이란 이런거야. 기쁨이란 이런거야, 라며 기다림은 어느새 행복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행복도 한순간의 꿈이 되어있었다. 우리 둘은 즉시 헤어짐을 직감했고 기다림뒤의 아쉬움. 회한. 안따까움들이 물밀듯 일렁이고 있었다. 먼하늘로 공중비행을 준비 중인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에 쓸쓸함이 자리했다. 애벌레의 고향은 경기도, 어른벌레의 고향은 전남. 물고기가 지느러미로 첫 헤엄치기를 하듯 훨훨 창공을 향해 날아갔다. 빨리 제 짝을 찾아야 할텐데. 그리고 쥐방울덩굴을 찾아 2세를 위한 유전자도 남겨야 할텐데.
모처럼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행복을 가져다 준 그녀에게 감사했다. 목놓았던 기다림은 어느새 파랑새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
계속해서 어쩌다 한방살이, 담색긴꼬리부전나비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