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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영그는 마루금

우두령 ~ 추풍령, 별을 헤이며 걷는 길

by 플랫폼


얼마간의 기다림이 있었다. 그 기다림은 지루함이자 간절함이었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한달간의 기다림 후의 또다시 재회한 우두령. 그 만남의 시간은 마치 찰나의 순간처럼 너무나도 은밀하게 다가왔다. 마치 1년, 아니 10년처럼 멀게만 느껴졌던건 무슨 연유에서 일까.


초승달이 유유히 그 빛을 발하고 사방이 고요속에 깊이 잠든 어느 고갯마루.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는 육신을 풀어줄 시간도없이 삼성산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오르는 길 발걸음 웬지 가볍고 온순했다. 어느순간 오름짓하다 말고 난, 별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갑자기 별자리들을 헤이기 시작했다. 카시오페이아 같기도, 전갈자리 같기도. 어쩌면 물고기자리 였을수도.


소싯적 한여름날 내가 살던 시골집 마당 한켠에서 보았던 그 별들처럼 무한 반짝거렸다. 분명 우리 가족들 마음속깊이 새겨져 있던 그 별들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 밤이되면 마을 전체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가로등도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저물녘 동네 고샅길을 오가기라도 할때면 밤하늘의 달빛이나 별빛에 기대야만 했다. 집안 일들도 오롯이 호롱불에 의지해야만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시절 별들의 이야기는 매일밤 한적한 시골마을 이곳저곳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시절 인연되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여러번. 그때 웃고 떠들었던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걸까. 분명 지금의 날 빚어 놓았던 시절 인연들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흐르는 시각.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면 동네 고샅길에서도, 동구밖 정자나무에서도, 마을앞 조그만 강가에서도 어김없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심지어는 벼이삭이 누렇게 영글어가는 논가에서도. 어떤날은 은하수들이 우리들 마음속에 우수수 떨어져 내린적도 있었다. 옥수수가 익어가던 어느 여름 밤날, 동구밖에 별하나가 떨어지는 날에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수근거리곤 했다. 오늘 누가 망자가 되어 떨어졌나. 어떤이는 떠돌이 거지 팔만이 일거라 수근거리기도 했다. 국민학교 시절, 밤하늘의 별들은 우리의 꿈이자 파랑새였다.


별을 헤이며
하늘의 길을 걷고 있었다.
휘영청 피어난 초승달의 엄호를 받으며,


우린 휘영청 피어난 초승달의 엄호를 받으며 점점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까실쑥부쟁이 한송이 달빛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 발광체 같았다. 어쩌면 소싯적 떨어졌던 별들중에 하나가 이곳으로 와 꽃으로 환생되지 않았을까 싶어지기도. 길섶 주변 기름나물, 대간러들의 헤드렌턴 불빛에 아름답게 빛났다. 가을의 소리들이 이곳에서도 유유히 파고든다. 가을 기운도, 가을 느낌도, 가을 노래가 움틀대듯 피어나기 시작했다.


괜시리 마음이 설레였고 요동쳐왔다. 이런 저런 오만가지 잡스런 생각들에 빠져 무심으로 올랐더니 삼성산이다. 능선인 이곳에서도 별들 제법 피어났다. 하늘에 핀 별들과 사바세계 저 들녁에서의 별들이 함께 피어 조화되어 있었다. 삼성산은 그져 그런 평이한 봉우리였다. 어둠속으로 마루금의 산그리메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우린 그리메의 엄호를 받아가며 그리움으로 걷고 있었다.


끝이 어디일지도 모른채 막연함으로 한발두발 걷는중. 무심이 가득 깃들어 있었고 그 무심으로 걷다가 가끔 길을 잃기도 했다. 그것도 인생길이니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지 싶었다. 바람재로 향해 걷고 있었는데 어느순간 그 바람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멈춘 발걸음이 괜히 뻘춤해졌다. 무심이란게 날 이곳까지 데려온게 아니었을까.


오르막후엔 어김없이 또 내리막. 눈가에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분명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발걸음마져 무거워졌다. 잔뜩 고개숙인 풀들 모습도 보였다.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린채 머릴 땅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쳐박고 있었다. 새벽이슬 때문이었다. 대간러 배낭위에 앉아있는 노린재 한마리도 머언 여행을 떠나는 중인가 보다. 주인공은 장흙노린재였다. 어찌하여 우리와 함께 머언 길을 떠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내리막후의 또다시 오르막. 이번엔 된비알 깔딱고개였다. 오름길에는 여지없이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때로는 돌뿌리에. 때로는 나뭇줄기에 의지해 올랐다. 구부렁길이었다. 숨이 차올랐고 이 오름길마져도 내 허접한 인생길처럼 반듯하지 않고 구불구불했다. 무심멍으로 올랐더니 좀체로 정상을 허락치 않던 그 형제봉이 서있었다. 잠시의 쉼이 필요했던 난 물한모금을 목에 간신이 넘겨주었다.


자연과 나. 숲과 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잠시 명상에 잠겨본다. 그 긴장의 원인은 뭘까. 끈을 늦추는 방법은 없을까. 자연앞에서 세치혀를 여는 대신 모든 오감을 이용해 귀를 쫑긋이 여는건 또 어떨까. 숲속 아주 작은 움직임 일지라도 세심히 들어주는 마음의 자세. 오늘따라 짙은 어둠속에서 자꾸 방향감을 잃기를 여러번. 드디어 점점 어스름이 걷히고 여명이 피어 오른다.


햇살이 가늘게 부서져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순간들. 자신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새 어스름이 서서히 걷히고 바람사이로 스며드는 한줄기 공기마져 제법 투명해진 새벽. 그리고 저 동녘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여명을 보며 깊은 생각에도 잠겨든다. 난, 이곳을 왜 걷고 있는걸까. 답이 있을리 만무했지만 다만 느낄 순 있었다. 나의 비루해진 정체성 때문이겠지. 어쩌면 지나친 자부심 때문었을 수도.


가을의 소리들이 곳곳에서 울려퍼진다. 여명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십여분 걸어 주었더니 어느새 황악산이었다. 인증하러 줄을 서있는 대간러 몇 분들이 보였다. 대간 마루금 도전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3달여가 지난 시간. 그렇게 세월은 차곡차곡 흘러갔고 추억이 되어 켜켜이 중층처럼 쌓여만 갔다. 처음엔 서로 서먹서먹했었는데. 내 몸하나 가누기 벅찼었는데. 이젠 어엿이 하나가 되고있는 팀원들.


시간이 조금씩 지나 어느덧 여유란게 생기면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인과관계가 제법 쌓여만 갔다. 정상부근 억새가 바람에 가늘게 흔들거렸다. 억새사이로 햇살이 고요히 스며들고 난 억새의 진솔한 마음마져 느껴보려 가까이 다가갔다. 억새의 숨결이 가늘게 느껴졌다. 서서히 어스름이 걷히고 결국 여명이 피어 올랐다. 우린 누가 먼저랄것이 없이 머언 동녁의 일출의 광경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러댄다.


새로운 세상의 열림이자 나의 염원들이 가슴에 와닿는 시간이었다. 구성지고 가슴 저려왔다. 나도 저처럼 모든이의 관심을 사로잡는 발광체일 순 없는 걸까. 눈이 부셔왔고 잔잔한 그리움 일렁였다. 마치 나와 세상을 잇는 브리지처럼 느껴졌다. 세상과 생명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무언가 삶의 이유같은게 꿈틀대고 있었다. 이런날엔, 헤어졌던 첫사랑에게 쪽빛하늘에 그리움 듬뿍담아 안부 편지라도 한통 보내야 될 것 같았다.


일출의 빛들과 함께 또다시 걷는다. 이번에 해발 1045미터 선유봉. 멀리 김천시가 운무의 바다속에 깊게 잠겨 허우적대고 있었다. 마치 신선이 사는 세계처럼 운무 가득했다. 점차 에메랄드빛을 거쳐 쪽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하늘. 난, 어느날부터 쪽빛이 좋아졌다. 눈이 부시고 가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볼때면 난, 쪽빛을 떠올리고 했다. 쪽빛하늘속에 파묻히다 보면 내 마음도 파란 도화지 물감속에 온통 물들어 버릴것만 같았다.



기다림이란 어떤 색일까.
그리움이란 무슨 빛일까?
에메랄드빛?
아니면 잿밫?



난, 기다림이나 그리움엔 쪽빛이 더 어울릴것만 같았다. 어쩌면 후천성 그리움일거라 생각해보기도. 이미 내 마음은 쪽빛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 피어오르는 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금 걷는다.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는 해. 나와 해는 너무 멀리 있었다. 다가설만하면 저만치 달아나 버리고 멀어질라치며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산길은 생각만큼 그리 곱지가 않았다. 오르막후엔 꼬옥 내리막. 그리고 심하게 구부러진 길. 뾰족솟은 돌뿌리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오름짓엔 심장에게 미안해졌고 내림짓엔 무릎에 무한 죄송했다. 여우가 살았다던 여우굴도 지났다. 소싯적 마을 어른들께 수십번도 넘게 들었던 여우 이야기를 추억 소환해 보았다. 정말 여우 새끼들이 갑자기 뛰쳐 나올것만 같은 분위기.


여시골산 또한 평이했고 시시했지만 마음만은 상큼했다. 밤새 나목들이 뿜어낸 상쾌한 공기가 날 카타르시스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온통 감사할일 투성이인 마루금.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또다시 내리막이 계속된다. 마치 낙타의 등짝같았다. 마음속의 고운길은 오직 나의 소원일 뿐. 내려서는 길 긴가위뿔노린재가 산초나무위에서 새로운 아침을 즐기는 중.


짝은 어디에 두고 홀로 이곳을 어슬렁 거리는것인지. 암컷혼자 수행중이었다. 그리움의 끝은 어디쯤일까. 나는 왜 끝없는 대간길을 이렇게 허둥지둥 걷고 있는 걸까. 3달간의 마루금길의 여정들. 그 속에 난 수없이 흔들렸고 또 무너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마루금은 날 보듬어주고 잡아주었다. 힘들어 멈추고 싶을 땐 조건없이 닻이 되어 주었고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다시금 달리고자 안달이 나 있을 땐 어느덧 돛이 되어주기도 했다.


분명 어디쯤엔 끝이 있을거야 하는 막연함으로 걸었더니 내 육신과 영혼은 어느새 괘방령에 닿아 있었다. 옛 선비들이 등에 짐짝하나 걸쳐메고 수없이 드나들었던 그리움의 고개. 무슨 진한 사연들 숨어 있을까. 조용히 귀기울여 보았지만 자동차 한대 다니지 않는 조용한 고개일 뿐이었다. 그 고갯마루엔 달개비하나 곱게 피어 나그네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열씸히 꿀 삼매경에 빠져있는 큰주홍나비의 모습도 보였다.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늘길은 어느새 사람냄새 가득 풍기는 속세로 내려와 있었다. 그져 밋밋하기 그지없는 동네. 마루금도 가끔씩 사람사는 세상이 그리웠던 걸까. 길은 외롭지 않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도 빛났고 휘영청 달님도 우리 앞길에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쪽빛하늘과 가을문턱 소슬 바람은 그져 덤이었다. 그 바람은 나의 간절함 마음 가득담아 먼 님에게 간절한 마음들 실어 날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땅에는 꽃들이. 나무위엔 애벌레들이 있었다. 몸을 잔뜩 낮추었던 마루금이 다시금 허리를 펴기 시작한다.


또다시 해발고도 몇 백미터를 치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 나의 저질 체력은 점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길섶에 청개구리 한마리 눈을 부라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 쉬는 중이니 조용히 지나가라는 듯이. 묘하게 청개구리의 마음처럼 내 두다리와 심장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산초나무 위에는 호랑나비 한마리도 홀로 고행중에 있었다. 이무기가 되고자 승천 준비중일까. 도대체 가성산은 어디쯤일까. 호랑나비 애벌레의 커다란 눈동자가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몸은 지쳐가고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길섶 억새 한송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와중에 야생화와 애벌레와의 눈맞춤만큼은 계속된다.



쪽빛하늘에 그리움 듬뿍담아
첫사랑에게
가을의 편지라도 써야 할것같았다



심신이 지쳐 물한모금 간절해 지려던 찰나 갑자기 나타난 나비 한마리. 날개에 파란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청띠신선나비였다. 마치 자신과 잠시 놀아주길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내 등짝에 앉았다. 배낭에 앉았다. 다시금 저 멀리 나무위로 올라갔다가. 난리 부르스를 쳐댄다. 물한잔 들이켜주고. 옆눈으로 실눈뜨고 보았더니 결국 바위위에 앉았다. 제법 유순하고 얌전했다.


맨탈멀미로 정신이 혼미해져갈 무렵, 수많은 땀방울을 토해낸 끝에 도착한 해발고도 716미터 가성산. 정상석이 온몸으로 날 반겼다. 드디어 다 됐다 싶어졌다. 이젠 마지막 봉우리 눌의산. 추풍령까진 이제 8킬로미터. 이미 도착한 선두조. 벌써 도착이라니. 분명 조물주의 유전자 조작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어찌 그리 내달릴 수 있단 말인가. 한숨소리가 짙어만 간다. 그 사이 애기세줄나비 한마리 약올리듯 내 눈앞을 활공하며 지나갔다.

얼마나 더 올랐던 걸까. 집채만한 바위위에 노란글씨가 눈에 띄였다. 웃고 참자. 사실 난 전혀 웃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헛기침 몇 번 해주고 웃어 보았다. 사냥꾼 광대파리매 한마리와 나와의 추격전이 한동안 계속된다. 마침 사냥에 성공한 뒤. 나에게 웬 참견이냐며 따지는 듯. 단톡방 메시지가 계속해서 울려댄다. 내 마음이 낭떠러지처럼 폭삭 주저앉는다.


달팽이의 마음이냐. 차타의 마음이냐. 이 가을의 소리들을 외면한 채, 가을 낙원의 부탁을 외면한 채 그리 총알처럼 가버릴 수 있다니. 드디어 달팽이에게서 터득한 느림의 미학울 떠올리며 걸어줬더니 선두조와 두어시간 늦은채 도착한 마지막 봉우리인 눌의산. 저 멀리 추풍령 들판이 드넓게 펼쳐졌다. 인생길이 끊임없는 마라톤길이라지만 난 마루금의 마음이 갑작스레 궁금해졌다.


어떤 마음일까. 내리막길. 패잔병처럼 축 늘어져 걷다보니 오늘의 마지막 종착역인 추풍령. 그 고개는 화려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옛 영화를 거의 잃어버린 그져 그런 옛고개 같았다. 대신 솔직했다. 시간이 멈춰버린듯 느리게 흘렀고 아늑했다. 그렇게 그 고개는 살포시 내 마음에도 와 닿고 있었다.


바람의 열기는 조금 부드러워졌고 햇살마져도 제법 온화해진 고개. 가을의 소리들이 도처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여름처럼 요란하지도 않았다. 내 무덤덤한 더듬이로도 총분히 느낄 수 있게 따스하고 고왔다. 하늘에 핀 뭉게구름들 바람따라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황금들녘으로 물들인 추풍령엔 가지가지마다 풍성하게 달린 감들이 즐비했다. 햇살에 반짝거리던 잘익은 감들을 마음속에 눌러 담는다.


길은 정직했다. 육신은 무거웠지만 나를 지배하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발과 심장에게 오늘도 무사히 이곳까지 데려와 주어서 눈물나게 고맙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움 짙게일어 외로움 잊어본 하루가 아니었나 싶어졌다.


계속해서, 15 마루금은 키를 한껏 낮추고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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