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령 ~ 큰재, 마루금의 아픔을 생각하며
제법 단단하던 커맨드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던건 바로 마루금 때문이었다. 루틴 때문이었다. 지금껏 나를 지탱해준 내 인생의 총지휘자인 전두엽이 갑작스레 가출해 버렸던 것. 갑자기 무박산행이 당일산행으로 뒤바뀌고, 백두대간 마루금 금산이 갑자기 흉물스런 몰골로 나에게 나타나고. 이번 산행은 한마디로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아침 9시가 조금 넘는 시각. 도착한 추풍령 고개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온화한 그런 전형적 시골 마을이었다. 마치 소싯적 내가 살던 시골마을처럼 평화 가득했다.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의 합창소리가 울려 퍼지고 가을 따사로운 햇살은 나뭇잎 사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감나무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린 감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여 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난 점점 소싯적 고향마을의 향수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네 청춘의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그 곳으로. 감나무 아래는 어린시절 그야말로 청춘의 꿈들이 모락모락 피어나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흔들리지 않는 고향만의 편안함과 안락함들. 그곳은 나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행복발전소였다.
우리의 청춘들은 봄이되면 바닥에 떨어진 감꽃들을 주워모아 한바탕 축제를 열었고 여름이 되면 감나무 아래는 온통 낭만이 샘솟는 그런곳이었다. 여름의 싱그러움이 지나고 가을의 풍요로움과 허전함들은 덤이었다. 감을 수확할 때 마을 어르신들은 까치밥이라며 꼭 한두개씩을 꼭 남겨두시곤 했다. 겨울의 여백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였을까.
하늘은 뭉게구름으로 가득했고 한무리 대간러들은 그 쪽빛하늘을 피해 구렁이 담넘듯 점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전두엽 가출사건은 마음속에 꾹 눌러둔 채. 잘익은 밤알들도 제법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 많던 다람쥐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껍질을 벗겨 목에 넘겨보았다. 담백했지만 그리 상쾌하진 않았다. 메뚜기들도 부산스럽게 움직여대며 가을 준비에 한창. 우린 이내 금산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름길 밋밋했고 그져 평이했다. 소싯적 내가 뛰놀던 뒷동산처럼 포근했지만 한편으로 너무도 시시하기도 했다. 대간다움이란 도대체 뭐길래. 내 생각으론 일단 해발고도가 높아야 했고 또 자연스러워야 했다. 또한 울 민족의 정체성과 정신이 듬뿍 담겨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마구마구 어지러워졌다. 현기증으로 인해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리기를 여러차례. 마치 총이라도 몇 방 맞은것처럼.
진정 이 길이 마루금길이 맞는 건지가 의심스러웠다. 캐피탈리즘의 탈을 쓴 자본예찬론자들은 어느순간부터 이 길을 마구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번쯤 자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만도 했지만 그건 언감생심. 사실 지난 몇 년의 시간동안 난 금산의 모습이 어떨지 무지 궁금하기도 했다. 애초 마루금 걷기의 단초가 금산이었고 지금 걷고있는 이유도 금산 때문이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읽는 동안 난 묘한 감정에도 휩싸였다.
처참하게 파헤쳐져 흉물처럼 널부러져 있는 마루금의 모습들. 난 그 흉물스런 몰골을 보며 점점 마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문명의 이기들에 의해 앙상하게 일그러진 우리네의 자화상같았다. 정상은 반쯤 파헤쳐져 모두 철조망으로 뒤덮혀 있었다. 처음엔 몰랐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척 눈을 감았을지도 모르는 일. 대간이 이렇게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을 거라고.
대간에 오르면 축복의 땅, 행복이 충만한 여행길일거라 생각했다. 언제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후 70년대까지 철도용 쇄석자갈을 채취했었단다. 난 몰랐다. 대간 마루금이 이렇게나 처참하게 난도질 당했다는 사실에 난 그져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울 민족의 정체성이 듬뿍 베여있는 마루금이 헐려 철도용 자갈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찌 이 땅에 이런 일이 스스럼없이 자행되었던 것일까. 깎아지른 절벽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아슬아슬 절벽과 끝없는 낭떠러지. 내 마음은 마루금의 환상과 현실사이 어느 경계지점에서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 만약 반쯤 간신이 남아있는 금산이 헐리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나리 철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차가 달리지 못하는 걸까.
자병산 반쪽이 헐리지 않았다면 아파트 몇 천채. 고속도로 교량 몇 천개 정도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을까. 그런 괴기에 가까운 생각에 잠겨보며 마루금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었다. 신음소리라도 좋았다. 갑자기 마음이 고장이라도 나버린 것처럼 지쳐만갔다. 마음도 걸음도 차가워지고 말라가는 중. 배낭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게가 날 짓누른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지나가 버린 대간러들의 심정이 궁금해졌다.
그들은 정말 괜찮은 걸까. 정말 아무렇치도 않은걸까. 하지만 아무런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소리만이 휑하니 지나갈 뿐. 희한한 몰골을 한 금산을 뒤로한 채 돌아서는 길. 바람소리마져 점점 스산스럽게 불어왔고 갑자기 마루금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길섶에 구절초 바람에 심하게 흔들거렸다. 닭의장풀도 흐느끼는 듯 했다. 그들도 금산의 아픔을 아는걸까. 주변 나무도 꽃들도 심하게 요동쳤다.
씁쓸한 마음 부여안고 다시금 걷는다. 걷는데도 마음 멍해져 갔다. 마음 편치 않은 길이었다. 길은 소나무 우거진 솔숲사이로 구불구불 휘였다가 다시금 반듯하게 이어지기를 여러번. 갑자기 유체이탈이 된 유령처럼 마루금길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가을길도 하늘길도 점점 더 무의미해져만 가고. 이따금씩 집채만한 바위가 가는길을 막고 있어 휘돌아서 갔더니 어느새 다시금 내 앞에 마루금길은 다가와 있었다.
솔잎들이 어느새 갈잎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지난 여름 태풍에 쓰러져 있던 아름드리 나무들도 보였다가 금새 사라지고. 노란, 빨강, 파랑 색채가 서로 어울려 보였다. 아름드리 나무에 기대어 삐딱하게 늘어선 나무는 알까. 금산이 왜 헐리게 되었고 그 진부한 사연이 무었인지. 길섶주변에 개옻나무 한그루 자라고 있었다. 발아한지 불과 얼마안된 애숭이로 보였다.
벌써 떨어뜨릴 준비라도 하는걸까. 가을날 오방색으로 물든건 단풍나무만이 아니라는걸 외치는 듯 개옻나무도 새옻을 갈아입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봄의 다리를 건너고 여름 고개를 넘느라 몹씨 지쳤을 그들. 겨울의 언덕을 오르기전 무거워진 몸의 무게를 덜어내는 중이었으리라. 다음 생을 위하여 모든걸 비우는 계절. 잎을 버림으로써 내년의 삶을 보장받는 것일터.
난 어린 나무에게서 무얼 배워야 할까. 어리다고 말 못한다고 배울게 전혀 없는걸까. 나무에게서 버림으로써 또다시 채울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불필요한 욕심, 욕망, 미련들을 내려놓을때 나도모르게 새로운 공간이 다시 태어난다 걸. 떨어짐의 미학을 가르쳐준 나무들. 살아줘서, 묵묵히 제자릴 지켜저서 빛내줘서 고맙고 감사했다. 작점고개엔 나도송이풀이 외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착잡한 마음 잊어보려 애쓰며 걸었다. 마치 무시무시한 쇳덩어리 하나를 짊어지고 걷는 느낌이었다. 산도 아픔을 느끼는 것인지 의문에 의문을 품으며 걸었더니 용문산이었다. 해발고도 700미터가 조금 넘는 산이지만 오늘따라 누가 등뒤에서 배낭을 잡아 끄는듯 무겁고 또 힘들었다. 정상석은 온몸으로 격하게 날 환영해 주었다. 금산의 아픔 때문이었을까.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이마에 송송이 맺힌 땀방울을 깨끗이 닦아주는 고마운 바람이었지만 결국 내 착잡한 마음까지 닦아주지 못했다. 큰재로 향하는 중. 새 생명탄생의 신비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선다. 상수리나무 종자하나가 새 생명을 잉태하는 중이었다. 햇살이 디자인하고 빗물에 의해 단련된 그 조그마한 종자에서 종피를 뚫고 유근이 막 나오려던 찰나.
어느날 수분을 받아들여 그 딱딱한 종피를 뚫고 조용히 자신의 유전자를 키워내고 있었던 것. 몇 십년후 넉넉한 마음으로 숲을 품어 안을 테지. 신비 가득했다. 이렇듯 자연은 한시도 쉼이 없다. 조금 있으면 지상으로 자엽을 들어올려 햇빛쟁탈전에 돌입하게 되겠지. 금산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내리막이 계속됐다가 다시금 솟구쳐 오르기를 여러번.
길섶에 핀 구절초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다. 웅이산도 지났다. 황금색으로 물들인 들판. 수확을 앞둔 벼들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하늘처럼 내 마음도 그렇게 무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텅빈것같은 회색. 회색속에 갇혀버린 무채색. 무심으로 마음에 큰 응어리를 안고 걸었더니 어느덧 큰재가 지척이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몸을 최대로 낮춘 마루금은 어느새 세속의 이야기까지 품어내고 있었다.
어디까지 마루금인지, 어디까지가 사바세계인지 그 경계는 모호하기만 했다. 벚나무들은 벌써 반쯤 잎들을 거두는 중이었다. 달리던 자동차 속도에 의해 격하게 건조해진 바람. 그 바람에 몸을 맡긴채 또 몇 장 떨어뜨린다. 그렇게 벚나무는 먼저 떨어뜨림을 선택했다. 마치 선구자처럼. 그뒤로 다른 낙엽이 겹겹이 쌓여갈 것이다. 그것이 흙이되고 다음 해의 새 생명을 키우는 밑거름이 될터.
산은 때론 거칠고 때론 완만하고 잔잔하기도 했다. 오늘 산행은 정말로 바람없는 호수위를 걷는것처럼 고요했다. 금산의 기억이 떠오르다 이따금씩 잊혀졌다를 몇 십번 반복했다. 사방이 어둑해질 무렵 느즈막이 우린 큰재에 닿았다. 땀을 너무나 쏱아버렸던 탓일까. 갑자기 갈증이 심하게 일었고 마음 또한 바닥을 기었다. 간단히 씻어주고 우린 금새 서울로 향했다.
뭉게구름도 열씸히 어딘가로 가는 중. 나비들도 산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해는 점차 낮게 기울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서쪽하늘에서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피기 시작했다. 아름답다. 단아하고 선명한 아름다움. 빛이 만들어내 명작. 그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며 난 반쪽 금산의 모습을 그려본다. 앞으로 그 흉물스런 몰골을 어찌 두눈으로 봐야 할지.
결국 오늘 하루가 끝나간다. 오늘의 마루금길은 내 마음의 짐들을 비워내는 성찰의 시간이길 바랬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면의 내 하루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계속 날 어지럽게 했던 전두엽 가출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날 힘들게 했던건 루틴이 집나가 버린것만이 아니었다. 처참한 몰골을 한채 아슬아슬 버티고 있는 대간 마루금의 모습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냥 지나쳐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날 더욱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4차산업혁명. 메타버스 시대는 나의 보폭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결코 멈춤 버튼이 없는 고속열차의 진공속의 레일처럼 그렇게 유유히 흘러가고 말 것이다. 결국 나밖에 없다. 나를 멈추게 할 수 있는건. 이제 더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발걸음도 누군가의 마음까지도. 버스안 공기가 웬지 낮설게 내려앉았다. 세시간여 달리다 멈추다를 계속한 끝에 도착한 신갈정류장.
한동안 긴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내 한숨소리까지 집어 삼켜버렸다. 난, 왜 걷는 걸까. 왜 힘든 걸 택했던 걸까. 그러나 믿는다. 나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가지 않아 미쳐버릴 것이라고. 나라도 걷지 않는다면 백두대간 마루금에 대한 기억은 영영 사라져 버릴것이라고. 이것이 내가 마루금에 가는 이유이다. 걷는다는 건 결국 사라짐에 맞서는 숭고한 행위일거라고.
산은 늘 포근히 감싸주었다. 우리들의 더듬이가 무뎌 느끼지 못했을 뿐. 걷는다는건 내가 나와 만나는 일이자 내가 내 안으로 향하는 조그마한 길 일거라 믿는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때론 위로하며 세상밖으로 나를 드러내는 일일거라고. 오늘처럼 내 내면의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흐린 가을 하늘엔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