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재 ~ 버리미기재, 별과 함께 걸었던 길
커맨드도, 로케이션도 홀연히 집을 나가버린듯, 몹씨 지리하게만 느껴졌던 추석 연휴도 지나고. 그 지리함들을 뒤로한 채 또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도 떠남의 목적은 단 하나. 복잡하게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내 마음의 한자리를 비워내기 위해서랄까. 그야말로 쾌도난마 찾아 삼만리다. 가다보면 언젠가 때가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감까지 더해가면서. 세시간여 새벽공기를 가르며 도착했던 버리미기재는 어둠과 별들의 바다였다.
도착하자마자 무참히 깨져버린 기대감. 철조망으로 단단히 가로막힌 마루금길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켠이 몹시 시리고 아려왔다. 한무리 대간러들은 스스로 범법자가 되어 철조망 끝으로 타고 들어갔다. 막는자와 들어가려는 자와의 술래잡기는 언제쯤 끝날것인지. 오늘도 긴 한숨으로 첫걸음을 시작한다. 마음 한구석이 심하게 요동치는 밤. 북진이니 늘재에서 시작해야 할 마루금을 이곳 버리미기재에서 시작해야하는 대간러들.
비법정탐방로 단속이 주원인이었다. 언제까지 막을것인가. 민족의 정체성과 얼이 가득 서려있는 내 나라 산길마져 내 맘대로 다닐 수 없다니. 서글퍼졌고 한편으로 구역질까지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엔 별 가득했고 그 아스라한 불빛들 대간러들 심장속으로 점점 파고드는 중. 가느다란 별빛들이 사뿐히 마루금까지 내려와 대간러들 발걸음들 위에 살포시 비추이는 밤이다.
새벽 숲은 적막했다. 어둠을 칠흑이 삼켜버린걸까. 하늘엔 별들 수없이 부서져 내렸고 내 마음도 이내 소싯적 추억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소싯적 마을 동구밖앞에 떨어져 내리는 그런 별들처럼 아늑해 보였다. 바위 틈에 외로이 피어있는 구절초 한송이. 무슨 생각에 그리 골똘한 건지. 영롱한 별들과 구절초 꽃송이가 묘하게 조화되어 보였다. 촛대봉 정상석 위에도 별무수히 쏱아져 내렸다.
별들속에 묻혀있는 봉우리를 뒤로하고 우린 또다시 떠난다. 별이 있고 달이 있고 숲의 주인공들이 있어 더이상 외롭지 않아도 되었다. 촛대봉을 지나니 집채만한 바위하나가 대간러들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마치 자비란 없다는 듯이 부릅뜨고 우릴 째려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유격시작. 대간러들 머리마다 별들 반짝거렸다. 우린 칠흑이 삼켜버린 암벽들 사이로 대간러들 뒤꽁무늬를 따라 오르내렸다.
벌써부터 심장 박동소리들이 요란헀고 그 한숨소리들이 밤의 숲을 깨우는 중. 선답자들의 영혼이 깊숙이 베여있는 밧줄을 부여잡고 직벽을 타고 올랐다. 이처럼 힘들때 기댈 수 있고 붙잡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기쁨이고 행운인지. 때론 밧줄에 의지하고 때로는 영혼에 기대어 악명높은 암릉 직벽구간을 치고 올랐더니 대야산이었다. 공포와 오금이 저려왔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어둠속으로 흘러갔다.
산은 첩첩했다. 어디가 신선계고 어디가 인간계인지 그 경계마져 모호했다. 허공을 가르며 치고 오른 암봉엔 무서우리만치 바람한점 없고 고요만이 자리했다. 순간 알 수 없는 쾌감마져 느껴졌다. 카타르시스다. 중독성 강한 뭔가에 빠져버린듯. 외로운 정상석을 뒤로한채 다시금 무심하게 남으로 남으로 향해 걸어갔다. 별들의 엄호도 받으며. 밀재도 지났다. 끝이없는듯한 어둠의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산안에 있는 것인지. 산이 내안에 있는것인지 모호했다. 쓸데없는 잡념에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었더니 어느선가 갑자기 하늘의 색감이 변하고 있었다. 어스름이 걷히고 여명이 내 마음 속 깊은곳까지 스며들고 있는 중.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 한줄기 빛이 마루금을 물들이고 있었다. 더 이상 어둠의 횡포를 허락치 않으려는 듯 새벽은 아침 싱그러움을 몰고 들어왔다.
빨갛게 솟아오르는 태양은 차갑고 시린 지난 어둠을 뒷걸음치도록 칠흑을 빛안에 가두어 놓았다. 내가 힘들어 발걸음이 느려지기라도 할땐 한줄기 희망이 되어주는 일출의 장엄함. 내 마음은 어느새 저 동녘에서 용광로의 쇳물처럼 타오르는 저 태양속으로 함몰되듯 빠져들고 있었다. 동쪽하늘 산등성이에서부터 하늘은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찬란한 일출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 마음 평안해지고 엄숙해졌다.
고요했고 찬란했다. 마치 잔잔한 망망바다를 떠다니는것처럼 내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찬란함의 끝은 어디메일까. 여명의 기운이 차오르자 붉은해가 허공에서 불쑥 솟구치듯 튀어올랐다. 순간 모두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아~악. 붉은 기운으로 뒤덮혀버린 먼 하늘들. 그 사이 어둠에 묻혀있던 숲들에 가느다란 햇살들이 숨어들고 있었다. 숲을 지배하던 어스름은 물러가고 새로운 태양의 세계가 열리는 중.
우린 모두 헤드렌턴은 꺼버리고 자연의 에너지로 걷기 시작했다. 새들의 날개짓도 보였고 사방은 형형색색으로 갈아입은 가을 모습들이 요란했다. 머언 들판은 아스라했고 마치 수묵화를 그리다 남은 곡선들이 한폭의 산수화처럼 희미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곱디고운 운무의 바다였다. 경계가 모호한. 어디가 인간계이고 어디가 신선계인지 모른. 그 여백마져 알 수가 없었다.
그 운무타고 걸었더니 고모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물맛 영롱했다. 지치고 목마른 나그네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고마운 샘. 감사함 가득담아 마셨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이 시웜함. 그 근원이 무엇일지. 길섶에 곱게 핀 산국 한송이가 심드렁해진 날 위로해준다. 가을이 물들은 마루금길. 가을은 뭐가 그리 급한지. 하루가 멀다하고 길을 재촉한다. 아이러니의 극치랄까.
가을아! 잠시 가던길 멈추면 안되겠니? 이 몸이 설악산 진부령 넘어 어느 어귀에서 몹씨 심신이 지쳐있을때 한줄기 오방색 단풍으로 다가와 줄 순 없는거니? 지금 내 말 듣고있어? 야속한 가을탓에 내 마음은 갈피를 못잡고 어느 모롱이에 서성인다. 하지만 가야한다. 조항산 정상 언저리에서 형형색색의 단풍과 운무의 모습에 도 취해보며. 또 걷는다. 망망대해다. 순간 질긴 내 인생 여정들을 되새김질해본다.
과거의 수많은 실패와 좌절들. 땀과 눈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곳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조금 넉넉할 순 없었던 걸까. 한편의 환상드라마였다. 자연이 연출하고 숲이 주연, 그리고 수많은 자연의 주인공들이 조연인 파노라마같은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내가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다. 산행도 인생의 일부이고 대간길 또한 그 과정이다, 라는 단순한 명제를 이해하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들이 흐르다니.
배낭을 둘러맨 희망바이러스꾼들. 우린 걷는것보다 늘 경관에 취해있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묘한 상황. 우린 왜 이곳을 서성거리는 걸까. 마루금길 위에서. 난 어디를 가야하는지를 늘 자아에게 묻고있는 형국. 숨은 차오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암릉 언저리에서 난 왜 산행의 끈을 놓치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본다. 산야에 피어있는 야생화들에게도. 길바닥에 나풀거리는 낙엽들에게도 묻는다.
하지만 되돌아온건 스산한 바람만이 내 귓가를 스쳐올 뿐. 진정 내 빈 마음속에 채울게 뭐가 있을까. 채울수록 텅빈듯 가벼워지고 비울수록 쇳덩이를 진듯 무거워지는 내 마음의 그릇들. 산을 닮고 싶어하는 플랫폼의 두다리와 눈꺼풀이 몹씨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천천히 걷자. 제법 두터워진 가을 기암도 보고 괴석도 보고 암봉절경들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느림의 미학을 손수 실천하고 있는 한무리 대간러들. 걸어온 길 되돌아보니 머얼리 대간 산그리메가 부드러운 여인의 몸매처럼 유려했다. 멀리 청화산과 속리산 주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점점 심신이 지쳐가는 대간러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이런 산행을 왜하는지는 대간을 다스리는 신은 알까. 가을의 중심에 와있음을 알려주는 쑥부쟁이 한송이. 도도하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구절초 한무리.
과남풀도 졸고 있었다. 마르고 뒤틀린 이파리 하나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숲도 자연도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뭇잎한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걸 인간만 모르고 있던건 아닌지. 마침 네발나비 한마리 나타났다 사라졌다. 보잘것없는 나뭇잎 한장. 구절초의 간절한 절규. 쑥부쟁이의 강인한 생명력. 잡념으로 걸었더니 헤벌쩍 미소까지 지어주는 청화산 정상석이 버티고 서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다.
그리고, 깎아지른 내리막길을 걷는다. 어느순간 나에게 현타란게 와있었다. 정국기원단. 씁쓸함이 엄습했다. 빨갛게 먹칠해져 있는 이 괴기한 물체의 정체가 궁금했다. 정국. 정국신사의 줄임말로 야스쿠니 신사를 의미한단다. 무슨 천인공노할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민족의 정체성이 알알이 맺혀있는 대간 마루금의 한 복판에 이런 비석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다하니. 그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슬프다. 정말 웃프다. 우린 언제까지 이웃나라 때문에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나. 1대간. 1정간. 13정맥 이라는 우리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를 놔두고.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에 의해서 유린된 인식체계를 보며, 과연 우린 후손들에게 무슨 낱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무참히 짓밣혀 버린 자병산의 울부짖음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 나라 내 땅의 하늘길을 당당히 걸을 수 없다니 너무도 슬프다. 언제쯤 그날이 올까. 아니면 파랑새를 찾아 떠나듯 영영 한낱 꿈에 불과한 걸까. 상주시청과 산림청은 이 정국기원단이라는 비석의 진상을 조속히 파악해 주길 바란다. 신성한 백두대간 마루금 자리에 해괴한 비석이 왜 버젓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난, 앞으로 고토분지로가 남긴 지리인식체계인 태백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그런 용어는 쓰지 않기로 했다. 결국 더욱 명백해졌다. 내가 대간 마루금곁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내 땅의 하늘길을 범법자로서가 아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당히 걸어보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도 험할지라도. 그리고 꿈에 불과할지라도. 그 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릴것이다.
발걸음이 갈지자로 무거웠듯 마음 또한 혼돈으로 점철된 하루가 아니었나 싶다.
계속해서, 가을 낙엽소리 들으며 걷는길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