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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가을하늘엔

SAM과 운무와 함께 걸었던 길

by 플랫폼


새벽공기 제법 싱그럽고 내 마음은 괜시리 설렘으로 가득했다. 헤어졌던 마루금과의 재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고속도로를 달리는 길 차창밖으로 어둠속에 잠겨있는 산그리메들이 뉘엿뉘엿 보였고 난 점점 알 수 없는 그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짙은 안개와 이따금씩 뿌려주는 비가 내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드는 마루금 가는 길.


8월말 기족모임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 부득이 이번 추석시간을 이용해 재도전하기로 했다. 우두령에 애마를 주차한 후 금새 택시를 타고 부항령으로 향한다. 하늘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건지 온통 흐림투성이. 금새라도 비가 쏱아진데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그런 날씨다. 주섬주섬 여장을 챙겨들고 부항령으로 향한다. 오르는 곳에 표지석이 하나 그 자릴 지키고 있었는데 그곳엔 모르는 얼굴도 보였다. 훤칠한 키. 맵씨있는 얼굴.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아우라.


우린 누가 먼저랄것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바디랭귀지와 콩글리쉬를 총동원해서. 한국말로 또박또박. 안 녕 하 세요. 간단한 눈인사까지도 곁들였다. 그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이 온종일 내 머릴 흔들어 댈줄 미쳐 몰랐다. 그는 그곳 벤치에 앉아 간단히 아침식사를 먹는 중. 그런데 배낭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7~80리터정도되는 크기. 백배킹을 하며 대간을 종주하는 중이시란다. 그렇게 간단한 신상정보를 주고받았다.


대단하다. 한국인도 하기 힘든 일을 어떻게 이분이 도전하게 된것인지.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한편으론 너무 고맙고도 감사했다. 그 이름은 샘(SAM). 그가 내 핸드폰 메모장에 직접 또박또박 써준 글씨였다. 하지만 인연은 그걸로 끝이났다. 겨우 이름만 알아냈을 뿐. 국적이 어딘지, 사는곳이 어디인지, 나이가 어찌되는지. 더 중요한건 연락처 조차도 없이 우린 헤어져 버렸다는 것.



오늘처럼 흐린 가을날엔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편지라도 한통 써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움의 편지. 대상은 이미 정해졌다.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줘야 내 마음이 편할것 같았다. 또박또박 눌러 조심스레 적어 내려갔다.

DEAR, SAM.
만나서 너무 반가웠네.

우리 둘, 처음 만났을 땐 너무 경황이 없고 당황도해서 자세한 얘기조차도 미쳐 나누지 못했었지. 우리 한국에서는 그져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말하는데. 그런데, 우린 옷깃스친 정도를 넘어 음식도 서로 나눠먹고 비록 어설픈 바디랭귀지였지만 소통에도 상당한 진전도 있었지. 전화번호하나 따지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부항령 표지석 앞 아담한 벤치에 앉아 자네가 홀로 아침 음식을 먹는 중,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우릴 연결해 주었지. 동질감이랄까.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DEAR, SAM.
오늘은 마침 한국에선 추석명절이라네. 나혼자 앞서 오르며 후회도 나름 했었다네. 자네와 이야기라도 조금더 나눌 걸. 단 몇 십분이라도 함께 걸을 걸. 핸드폰 번호라도 하나 남겨둘 걸. 산행을 마치고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우두령에서, 집으로 오는 고속도로상 저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도 천만불짜리 함박미소를 짓던 자네 생각을 많이 했다네. 이 시간 자넨 어느지점에서 비박텐트를 치고 있는건지. 아참! 삼도봉에서 하룻밤 보낸다고 그랬었지? 지금쯤이면 함박만한 보름달이 머리위에 빛나고 있을 텐데. 혹시 고향생각, 가족생각에 깊이 잠겨 있지는 않은 건지. 깊은 상실감에나 잠겨있지는 않은 건지.

우리 첫 만남치곤 괜찮았지? 곶감 맛있게 먹어준것 너무 고마웠네. 나먼저 와버려서 많이 미안했다네.
혹여 비라도 오면 어쩌나. 마음 많이 조렸고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조금 나누어 지기라도 해줄 걸. 처음 자네 배낭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크기가 나에겐 너무나도 위압적으로 다가왔지. 저 무게를 지고 어찌 산길을 걸을 수 있는 건지.

나와 함께 인증샷 찍어준것 너무나 감사했고 기뻤다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그 천말불짜리 염화미소 뿐. 그래도 이름만이라도 알아낸게 어딘지 모르네. 사실 고향이 어딘지, 국적이 어딘지는 우리 사이에 그리 중요한건 아니었을 지도 모르지.

아무쪼록 대간여행 무사히 즐겁게 잘 마무리하고 부디 행복한 여행길 되시길. 인연이 닿으면 또 언젠가 깜짝 만남이 올수도.


샘때문에 심신이 몸씨 행복했던 날에 플랫폼이.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아쉬움만 가득 남긴채로. 이억만리 타국땅에서 대간 산행이라니. 마음에 가득 짐하나 진채로 난 금새 백수리산을 향해 떠났다. 터벅터벅. 지나가면서 몇 번 뒤돌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다금씩 귓가에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 오르는 길 뭐가 하나 빠진듯 허전하기만 했다. 마침 길섶에 노루삼 한송이 영글어가는 열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중력방향을 향해 머릴 쳐박고 있는 중.


가을이었다. 완연한 가을의 기운들이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도, 마루금길에서도 스며들고 있었다. 박수리산 된비알 깔끄막길에 까맣게 익은 정금나무도 하나 보였다. 정말이었다. 자연의 시계는 정확히 가을을 가르키고 있었다. 결실의 계절. 활짝웃는 숙부쟁이가 날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가을 마중 나오신 거냐고 묻는듯 했다. 백수리산 정상은 그야말로 운무로 가득했다. 신선이 산데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세계였다.

억새가 바람에 쉼없이 팔랑거렸다. 마치 현재 갈피를 못잡는 플랫폼의 마음처럼. 그러나 억새는 흔들렸다가도 금새 제자리로 되돌아 오곤했다. 오히려 나에게 세속의 소식들을 되물어왔다. 이윽고 사바세계 플랫폼의 하소연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온통 우울한 명절이 되고 있다는 속세의 이야기들부터. 물가는 오르고 민생은 어지로운데 정치권은 온통 당리당략에만 매몰되어 민초들에게 전혀 희망의 메세지를 주지 못한다는 것.


순간 억새가 흔들거리니 그 옆을 지키던 구절초도 흔들렸다. 그들은 알까. 사바세계의 이 끝이없는 이전투구들을. 운무 또한 바람에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무주땅에 서성거리다 김천땅을 오르내리는 중. 이따금씩 그 물방울들을 내 바지와 신발에 퍼붓고 있었다. 박석산 오르는중 산앵도나무 열매가 알맞게 영글어가고 있었다. 자연의 시계는 이처럼 정확하고 어김 없었다. 건전지 따위에 의존하는 인간들의 시계와는 차원이 다른.


박석산 오름길 어느 지점부터 날이 조금씩 개이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갈길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운무들. 마치 약올 올리며 뭐하러 오르는거냐고 훈계하는듯. 박석산은 그렇고 그런 산이었다. 흔들리는 날 조금도 위로해주진 못했고 허전한 빈가슴에 무언가를 채워주지도 못했다. 정상석 위에 메뚜기 한마리가 수행중. 아쉬움 뒤로 한채 또 떠남이다.


먼발치에서 바라다보이는 남도의 산그리메들을 어렴풋이 보며 걷는다. 구절초도 보이고 용담도, 천남성도 보였다가 사라졌다. 쑥부쟁이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위를 네발나비들 활공하고 있는 중.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그 흔들리는 모습 아련하고 처량했다. 세상 모든 아픔과 번뇌를 껴안은 듯 심장이 가련하고 아련해졌다. 용담꽃도 나에게 인사해왔다. 움츠려들지 않은 듯 고요함과 당당함들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미는 플랫폼. 그 진부한 모습이 보였다. 천남성 잎가에 물방울 가득했다. 이슬때문이었을까. 네발나비는 나의 관심을 사로잡으려는 듯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어떤때는 수도승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기도. 애처러이 자릴 지키고 있는 쑥부쟁이 한송이. 난 갑자기 생각했다. 마루금의 야생화는 왜 이리도 물방울을 끌어안고 있는 건지. 왜 이리도 슬프고 아련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대는 건지.

이제 완연한 가을처럼 완전히 제모습을 되찾은 마루금. 조금전 운무에 뒤덮힌 마루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역취 한송이 노오란 꽃망울을 피우며 차분하면서도 기품있고 절제있는 모습 가득했다. 나무와 운무와 마루금의 주인공들 이야기 들으며 걸었다. 그 곁에 자신의 모든걸 내어주는 자연이 있고 숲이있고 수많은 주인공들이 있었다. 무념무상으로 걷다보니 내 몸이 어느새 삼도봉에 닿아 있었다.


충북, 경북, 전북 삼도가 서로 화합하며 살기를 염원하며 조성하였다는 곳. 배낭을 풀었다. 간식을 먹으며 생각했다. 전혀 조화롭지가 않아 보였다. 그냥 간단히 표지판하나 세워두면 됐지. 뭐하러 그리 호들갑을 떠는건지. 작금의 정치상황들이 떠올랐다. 금산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당리당략에 온통 매몰된 정치권.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민초들의 삶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완벽한 갈라치기 정치들.


이념에 매몰된 조선시대 동인 서인들로 분당된 그 사림들같았다. 순간 정치혐오증이 악령처럼 되살아나는 듯 일렁거렸다.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밤 이국땅에서 하룻밤을 지내게될 샘은 어찌 생각할까. 마루금은 아무 잘못이 없다. 꽃도 무죄고 자연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할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루금은 우리에게 길을 내어주고 호흡할수 있게 산소도 내어주고 자외선을 피할 그늘을 제공해 줄 뿐이었다.


무심으로 가다보니 감투봉. 주변이 아스라했고 마루금은 위대했다. 한국의 산야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바위위에 구절초 몇 송이 피어 있었고 바람에 하염없이 살랑거렸다. 순간 운무도 피어 어울렸다. 산부추도 곁을 지키고 있었다. 길은 없어 졌다가도 어느순간 또다시 나타나 날 반겨주었다. 마치 나하고 술래잡기라도 하듯. 만약 이 홀로 산길에 길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 마음 오싹했다.


선답자들의 길이었다. 모든게 선답자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길이었다. 선답자들의 수많은 발자국과 영혼들이 중첩되어 보여졌다 이내 사라지기를 여러번. 푯대봉을 지나니 사방이 어느새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다. 끝을 생각하며 걸었다. 언젠가 길도 그 끝이 있겠지 조마조마 해가며. 고마운 바람에 그 바램 실어 보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발걸음은 미래세대를 위한 하나의 등불이 되어줄까.


숲은 한참동안 시야가 흐렸다가 맑았다가 반복했다. 이에 뒤질새로 마루금도 쪽빛과 회색이 번갈아 왔다갔다 했다. 석교산이 지나가는 길에 종족보존에 충실한 이끼하나가 갈길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투정도 없이 묵묵히 그 자릴 지키고 있었다. 마음으로 걸었다. 야생화들의 속삭임 소리들과 교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선답자들의 발자국들 따라. 나무들이 내어주는산소들의 고마움에 취해 그렇게 걸었더니 우두령이었다.


사방은 완전히 어둑해지고 시간은 오늘의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이 느낌 어찌 표현할까. 고요했다. 이 마음 어떻게 전할까. 해는 이미 서쪽으로 반쯤 기울고 있었다. 순간 나도 갑자기 구름따라 흘러가고 싶어졌다. 우두령 어느 언덕에 홀로 앉아 바라본 저녁노을은 유난히도 아름답고 느리고 고왔다. 해가 지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비슷하지만 난 이곳에서 아주 특별한 느낌들을 하나 남겼다.


어느새 그 붉은 빛은 마루금위에 스르르 번지고 그 빛들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순간 전하지 못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끝내 말하지 못해 아쉬웠던 이야기들. 늦은 오후의 빛은 한동안 나를 붙잡았다. 그리움이었다. 샘과 그리고 야생화들과 운무. 그리고 마루금들.


계속해서, 숲과 가을단풍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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