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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금은 행복을 이어주는 길

13 빼재 ~ 소사고개 ~ 덕산재 ~ 부항령, 21.1km

by 플랫폼

시작은 장대하였다. 그 오름길은 변화무쌍하였고 온통 가시밭길 투성이었지만 결국 내 가는 길까진 막진 못했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이끌려 오늘도 여전히 마루금 주변을 서성거리는 나. 또다시 집나간 자아찿아 떠나온 것일까. 아마도 대간 마루금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 떠나온 길 일 수도.


일주일 내내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날은 방향감을 잃코 반쯤 멘탈이 붕괴된 상태로 허둥거리기도 했다. 웬지 불안했고 일을 할때도 산책할때도 좌불안석이었다. 단지 내 관심은 오직 일기예보에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아마 수십번은 더 검색해 보았으리라. 다행히 태풍 카눈은 별 피해없이 무사히 빠져 나갔지만 마루금길은 도처에 그 아픈 상흔들이 즐비해 있었다.


카눈 덕분인지 한 여름의 땡볕더위는 기세가 한풀 꺾였다. 비도 쉼이 필요했던 것인지 아직까진 잠잠했다. 잠시후 초점산 오르는 길 언저리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전까지 말이다. 대신 구름이 잔뜩 낀 날씨. 비록 삼봉산 정상에서 오색찬란한 일출을 보지 못했지만 야생화들과의 만남은 모든 아쉬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장사였다.

모시대

유난히도 길게만 느껴졌던 3주간의 긴긴 기다림후의 또다른 떠남길. 마치 바랑하나 둘러메고 과거보러 먼 길을 떠나는 조선 선비처럼 마음 설레이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어깨에 무거운 배낭하나 짊어진 채 오늘도 예외없이 신갈정류장으로 향했다. 한쪽 귀퉁이에 몸을 맡긴채 버스는 유유히 미끄러지듯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도착한 곳은 빼재,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뼈저리게 서려 있다던 그 신풍령고개. 왕년의 영화는 다 어디로 가 버린건지 짙은 안개만이 휑한 바람따라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근래 이렇게나 짙은 안개를 본건 아마 처음인듯. 새벽녘 탄금호 물안개처럼 느릿느릿했다. 대신 모든게 분주했고 심지어는 매매소리마져도 깊이 숨직이던 새벽녁.


헤드렌턴을 켜자마자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이름모를 부나방들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리저리 활공 중. 반사적으로 난 스마트폰 카메라를 집어들고 번개의 속도로 찍기 시작했다. 먼거리를 마다하고 달려와준 플랫폼의 정성에 감복해서인지 유난히도 얌전히 모델역할을 잘해준다. 모진밤나방, 오얏나무가지나방과의 헤어짐의 시간은 금새 다가왔다. 한참 나방들과의 생태 놀이에 빠져 들다보니 휑한 고개엔 딸랑 리무진 버스와 나 혼자.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 빼재에서의 풍경이 내 기분과 같다. 아무도 없는 고개에 스스로 갇혀버린 걸까. 주섬주섬 챙겨 서둘러 들머리로 향한다. 헤드렌턴 불빛에 불나방들 혼비백산 이리저리 날아든다. 모든 이들이 잠들어있는 어둠속을 걷는데 며느리밥풀꽃 한송이 곱게 피어 웃고 있었고 도처에 풀벌레소리만 가득했다.


사랑이 익어가는 마루금

오르는길 하나라도 더 느끼고 기억하고픈 마음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신선한 공기가 내 폐부 깊은곳으로 닿기를 바라며 숨도 폐부 깊숙이 들이 마셨다. 오름길 오감을 모두 활용했다. 귀를 열어 자연의 소리도 담아본다. 내 기억 상자에 더욱 선명하게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라면서.


새벽 어스름을 뚫고 헤드렌턴 불빛에 의지한 채, 오르던 삼봉산 오름길,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카타르시스마져 생성되고 있었다. 간밤에 거미들은 잠도 거른채 허공에 길을 내놓았다. 그리고 긴긴 기다람과 설레임의 시간. 그러나 그 거미의 길은 무참히 부셔졌다. 대간러들의 출현에 거미들의 꿈은 풍비박산이 되어버렸던 것. 기다림이 이렇게나 허무해 질 수 있다니.


오랬만에 내 녹쓴 레이다에 걸려든 만삼 한송이. 태풍에 상처의 흔적이 여럿 보였고 어두컴컴한 길섶에서 홀로 자릴 지켜내고 있는 중이었다. 반가웠다. 만남은 가슴떨림이었지만 막상 헤어지자니 심장이 아려오고 발걸음마져 무거워졌다. 오름길은 소싯적 동네 뒷산처럼 밋밋하고 부드러웠다. 뒤늦게 나 홀로 터벅터벅 걷는 길. 마음에선 아무런 감정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져 무덤덤하고 오직 정상까지 올라야한다는 의무감 뿐.


드디어 한시간여 숨죽이며 오른끝에 도착한 정상석. 조금 외로워 보였다. 대간러 몇 분이서 인증샷 찍으려고 줄지어 있었고 난, 간단히 흔적 한장 남기며 서둘러 자릴 떠났다. 여기서 갑자기 생긴 의문점 하나. 삼봉산이라 하면 봉우리가 세개라는 의미일텐데. 나머지 두 봉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온전히 보지못한 채 자리를 떠야 한다는게 조금 씁쓸했다.


내 눈이 매의 시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불심, 산심, 무심이라는 삼심이 가득하다는 삼봉산의 본 모습을 보지못한채 떠나야 하다니. 그나마 꿩의다리 한송이 피어 날 미소짓게 해준게 그마마 위로였다. 자주색으로 피어난 꽃송이가 내 헤드렌턴 불빛에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3주전 덕유산을 떠나며 야생화와의 작별이 뭇내 아쉬움이었는데 의외로 이곳도 야생화 천국이었다. 참, 이곳도 덕유 삼봉산이라 불린다지.


새벽 신선한 공기 들이마셨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졸고있는 모시대와의 만남도 신선한 행복이었다. 모진 태풍을 어찌 버텨냈을까. 솟구쳐 오른 암봉 봉우리 위에 연분홍의 꽃송이 하나가 지나가는 날 붙잡는다. 며느리밥풀꽃. 웬지 외롭고 구슬퍼 보였다. 난, 생각했다. 살면서 이 꽃처럼 타인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사실 태풍이후 전국이 수해복구로 떠들썩했던 때 처음엔 떠나야 하는지에 고심했다. 이 시국에 꼭 산행을 해야하는지. 침묵후 돌아온 대답은 그냥 가기로 했다. 모처럼 자아와의 약속이었으니.

새벽 공기는 무척 싱그럽고 고왔다. 밤새 수목들과 들꽃들이 뿜어낸 숨들을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다. 시원하고 상쾌하다. 숨이 꽉꽉 막힐것 같았던 기분들이 어느생 뻥뻥 뚫린 느낌. 어수리 한송이 바람에 스산이 흩날리고 있었다. 청아하고 아련했다. 정상 바람은 나그네의 옷깃을 파고들고 있었고 어수리의 모습은 플랫폼의 마음과도 일맥 닮아있었다. 조그마한 미풍에도 자꾸 흔들리는 플랫폼의 현실과도 묘하게도 매치가 되고 있었던 것.


어느새 사방은 어스름이 걷히고 있었고 그 자릴 어느새 새로운 운무가 대신했다. 몇 십미터 내도 분간하기 어려운 짙은 어스름 뒤의 또다른 어둠. 대간러들이 도착한곳은 바람도, 구름도 쉬어간다는 소사마을 탑선수퍼. 곳곳에 태풍의 상흔들이 나그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배낭을 풀고 잠시 쉬기로 했다. 만면에 허름한미소와 함께 생수 한잔에 날씨 걱정, 복숭아 한조각에 짙은 한숨은 계속된다. 비 예보는 나의 마음을 점점 흔들어 대고 있었다.


조용히 명상에 잠겨있는 네점푸른자나방과의 헤어짐 후의 또다른 떠남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탑선슈퍼를 빠져나와 우린 우르르 콘크리트길을 걸었다. 드디어 감지되는 묘한 기운. 운무는 앞을 가렸고 가랑비는 추적추적 내리치고 있었다. 오방색 잎새 잔뜩 매달린 감나무 위에 까치 한마리가 짝을 찾는 것인지 대낮부터 까악까악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바람만은 제법 부드러웠다.


소사마을에서 네점푸른자나방과의 헤어짐은 긴긴 고난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메신져였다. 경종의 울림소리가 너무도 느리고 조용히 다가와 내 더듬이가 미쳐 듣지도, 보지도, 심지어는 느끼지도 못했을 뿐. 길섶에 뿔무늬큰가지나방, 작은민갈고리나방도 가부좌 자세로 흐트러짐없이 졸고 있었다. 수행 중인가해서 조용히 지나치기로. 산초나무위는 에사키뿔노린재가 사랑의 노래를 불러대고 있는 중,


마루금은
사랑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사과나무에도, 곤충들에게도
결실의 순간이자
사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오르는 중 우린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이쁘게 영근 사과 열매에 흠뻑 빠진 나머지 영혼이 집을 나가 버린 것일까. 태풍때문에 마루금길이 일부 유실된 사실을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것. 이토록 인간세상의 마루금은 우리의 마음을 갈기갈기 흔들어댔다. 몇 번 시행착오끝에 겨우 찾아낸 마루금길. 맥이 풀린다. 그 사이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쉽게 그칠비가 아님을 이내 느낄 수 있었다. 배낭커버도 덮어주고 우의를 걸쳐 입었다. 우의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묘하게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있었다.

식염포도당 두알을 축축한 목속에 억지로 집어넣어 주었다. 열애중인 에사키뿔노린재. 벚나무잎에선 갈색날개노린재가 열씸히 사랑중에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 따윈 아예 신경쓰지 않는 눈치. 운무와 가랑비와의 힘든 사투를 시작하려는 건지 묘한 기류마져 형성되고 있었다.


길섶에 오미자 열매도 붉게 영글어가고 있는 중.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의 기운들이 피부속으로 느껴진다. 마음속으로 죄없는 기상청만을 원망하며 걷는데 점점 운무는 짙어지고 참나무 이파리들도 빗방울에 출렁거렸다. 천신만고끝에 오른 초점산. 정상석도, 하늘도, 심지어는 내 마음조차도 비에 젖어 점점 쪼그라 들고 있었다. 내가 밤새 걸어왔던 덕유 삼봉산도 운무속에 깊이 묻혀 있었고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내 등뒤로 빗방울은 세차게 내리쳤다.


풍로초 한송이 홀로 피어 흐느끼고 있는 마루금길.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 물속을 걷고 있는 듯 신발속에서 철철 소리가 점점 진해져 갔다. 와중에 한껏 물기를 머금은 미역줄나무가 가는 길을 막아선다. 지나가는 대간러들의 발길에 치여 이리저리 나뒹구는 풀들도 자신이 온종일 받았던 수분들을 지나가는 객들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중.


무단침입이었다. 난 그들에게 들어오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우산이라도 펼쳐 들어야하나. 쓸데없는 망상이었다. 두손은 이미 스틱들이 점유한 상황. 죄없는 물방울들이 새로눈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 등로도 영락없이 내 인생지사를 빼닮았구나. 내리막후의 오르막, 내려설만하면 또 이 악물고 오르기를 여러번. 집나간 자아찾아 떠나온 길에 또다른 근심과 걱정들이 마음속에 들어서고 있었다.


대덕산 오름길에 억새들이 머릴 땅바닥을 향해 쳐박고 출렁거렸다. 바람따라. 빗줄기따라. 억새들도, 정상석도, 정상공기도 내 무덤덤한 마음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물분자들과의 한판 대결이 점점 불가피한 상황. 걸을때마다 철퍼덕, 철퍼덕거리는 소리 요란했다. 여벌의 양말조차도 없다. 동자꽃 한송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그는 알까. 심란해져가는 플랬폼의 마음을. 영아자들도 빗방울에 출렁거리기를 여러번.


난, 오직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랬다. 마음의 배낭에 이 모습 차마 담아내고 싶지도 기억하고도 싶지 않았다. 하지만 끝은 멀고도 험했다. 기다려도 영원히 오지 않을 님처럼. 가도가도 끝이없는 사막길 같았다. 애써 괜찮은 척도 해보았다. 별일 아닌듯 미친 사람처럼 웃어보기도. 그때 뿐이었다. 몇 번의 헛기침소리도 내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러다 불편해졌다. 물분자들이 점점 신발속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


괜찮치가 않았다. 물들의 괜한 심술에 난 흔들리고 있었다. 점점 물분자들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나. 수분들은 집요헀다. 날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내 앞에 나타난 구세주. 대덕산 얼음골 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일명 대약사. 한모금의 물을 목으로 들이키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이제 정말 초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되잡아야 하는데. 점점 스산하고 분주해지는 숲의 모습. 내 마음도 점점 가라앉는다. 갑자기 나무들과 야생화들의 진솔함이 궁금해지고 있었다.

가랑비는 일렁이고 운무는 춤을 추었다. 드디어 덕산재를 향해 내려서는 길. 한적한 참나무 아래 긴산꼬리풀 한송이 피어 바람에 출렁이는 중이었다. 그들도 비때문에 힘이라도 들었던 걸까. 발바닥이 땅을 내딛는 소리와 물분자들의 철썩이는 소리가 묘하게 일치되고 있었다. 마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지휘하는 교향곡되어 숲속으로 울려퍼지는 것처럼.


얼마나 더 걸었던 걸까. 어느새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치는 중. 일그러진 마음이 어느정도 피려던 상황에 아담한 폭포가 나왔다.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이곳엔 어느새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등목을 하시는 분들. 아예 등산화까지 신은 채 폭포수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계시는 대간러분들.


마루금길에 새로운 낙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양말을 있는 힘껏 짜내어 다시 갈아 신었다. 걸음걸이가 어느새 힘차고 가벼워졌다. 변덕스러운 플랫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르하다. 좀전에 힘들었던 기억들은 이미 잊은지 오래.


얼음골 약수터에서
목을 추기는 길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던지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가닥 그림움으로
솟아나고.....

대약사 올림

철퍼덕소리가 이내 가느다란 미소로 뒤바뀌고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모든걸 내어주는 자연의 너그러움에 취해버린 걸까. 여유로움마져 물씬 묻어난다. 갑자기 세상에 부러운게 없어진다. 듣고 싶은것도. 말하고 싶은것도. 심지어는 원하고 싶은것마져도. 오직 소원이 하나 있다면 죽는날까지 산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보다 가고 싶은 산이 더 기다려지는 현실.


그러는 사이 도착한 덕산재. 이곳 또한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곳이다. 식염 포도당 두알을 반강제적으로 목에 넣는다. 지금부터는 인내와의 싸움이다. 묫가에 무릇 하나 피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수행중인걸까. 다시 오름짓 구간.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오른다. 속도는 지렁이 속도로 변한지 오래. 마지막 6킬로미터.

남은 여생은 항상 산과 함께 살 수있기를 소망하며 염불하듯 올랐다. 야생화와 자연의 주인공들과 교감하며 자만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그렇게 살면 그만일듯 싶어졌다. 천남성 열매도 어느새 붉은색으로 채색돠어 가고 있었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때로는 바위귀퉁이를 붙들고 올랐다. 살면서 이렇게 뭔가를 붙잡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운인지 이제는 정말 알 것만 같았다. 그져 상상만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중.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에 심장이 터질것만 같다. 고단한 인생길에도 이렇게 기댈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메고들빼기가 한송이 하늘거렸다. 내 마음을 아는건지 미소까지 잔뜩 선물해 주는 그녀. 뒤돌아보니 운무에 뒤덮힌 대덕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내 허접한 삶에서도 저렇게 지나온 여정이 뚜렷하게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갈나무 이파리에 참나무재주나방 애벌레 한마리도 있는 힘을 다해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바닥에는 신갈나무 가지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도토리거뷔벌레가 2세를 위해 떨어뜨려 놓은 것일터. 때로는 땅이 꺼질듯 깊은 한숨도 지어보고 때로는 돌뿌리에도 넘어질 뻔 하기를 여러번. 등산화 신발속을 독차지해버린 물분자들과 시름하며 무심으로 걸었더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부항령이다. 비는 완전 개였고 잿빛 하늘은 어느새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난, 왜 이 길을 걷고있는 것일까. 갑자기 마루금의 참된 의미를 모른채 살아왔던 60여년의 세월이 번뜩였다. 비가 그친 자리, 하늘은 잿빛으로 깊이깊이 물들고 있었다. 내 마음의 온도는 현재 몇 도 쯤일까. 굳이 말하자면 흐림과 맑음 사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완주했다는 성취감에 멘탈붕괴 직전까지 갔던 마음이 이미 현타라는 지점에 안착해 있었다.


독자님들! 저 뭔가에 깊이 빠져있는것 맞는거죠? 심각한 뭔가에 중독되어 있는건 아닐까요? 치료약은 과연 있는 걸까요? 생쥐가 물에 빠지면 왜 안되는 건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물에 빠진 생쥐 심정을 조금 이해할듯. 앞으로 산행시에는 정말 양말 두켤레는 꼭 지참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해준 오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2주후의 다음 산행이 또또 기다려진다.


계속해서, 14 사랑이 영글어가는 마루금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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