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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봉 지나 안개비와 동행하며

월성재 ~ 빼재 2부, 꿈의 길을 걷다

by 플랫폼

백암봉 지나니 안개비는 제법 묵직한 비로 변해 있었다. 쉬임없이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정처없이 걷는다. 마루금에서 빗소리는 나에게 백색소음이자 최고의 운율과도 같았다. 비와 나의 일시적 동행. 과연 괜찮은 걸까. 비와 난,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열씸히 밀당 중. 운무도 뒤따라와 다소곳이 지친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마치 나의 가는길에 응원이라도 해주려는 듯이.


우비 위로 두두둑 떨어지는 소리는 둔탁해서 좋고 나뭇잎 위로 슬그머니 떨어져 내리는 소리는 하늘하늘 출렁거려서 좋다. 때론 야속하기도 했다. 바지속으로 떨어졌던 비는 점점 내 등산화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걸으면서 난 철학자나 음유시인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매일 산책하며 삶을 깨달아가는 루소처럼 몽상가라도 되어 본다면 어떨까. 비와 나, 마루금과 자연의 주인공들 사이의 밀고 당기는 텐션은 계속된다.


이윽고, 새로운 깨달음의 경지에도 도달한다. 나의 허접한 시간들에도 느려지는 순간이 있다, 라는 것과, 갑자기 심장의 박동소리가 느릿느릿 뛰는 순간도 있다, 라는 사실을. 물분자들은 수시로 그 모습을 변화해 가고 있었다. 역시 변신술의 대가 다웠다. 안개비였다가 갑자기 굵은비로 변했다가. 지나가는 대간러들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력방향을 향해 하염없이 내리꽂는다. 점점 관성도 작용했다. 나뭇가지들이 머금었던 빗물들이 바람에 떨어지는 소리들으며 조용한 침묵속을 걷는다.


이제 막 꽂대를 들어올린 등골나물. 그 흔한 가림막조차도 없이 언제 그칠줄 모르는 안개비를 온몸으로 받아내고있는 중이었다. 소싯적 장독대 위에 내리치는 그 빗줄기처럼 초연했다. 어쩌면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대나무 숲에서 떨어지던 그런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언젠가 여름 한낱에 소낙비를 만나 암자 처마밑에 피해있던 중 채마밭 귀퉁이에 심겨져 있던 파초 이파리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곱고 애처로웠다. 어느덧 그 소리가 뇌리까지 오배랩되어 흐르는 시간.


운무와 구름비로 뒤덮인 숲은 점점 처연했다. 숲은 변치않는 마음으로 자신이 속한 왕국의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들을 품어 안아주고 있었다. 도대체 숲의 위대함의 끝은 어디쯤일까. 세찬 비바람으로 운무들은 미친듯이 능선을 넘고 골을 넘나들고 있었다. 나무와 풀들, 야생화들도 운무따라 바람따라 춤을 주고 있었고 어느새 귀봉을 지나다 바람에 실려 정처없이 흐르던 한무리의 운무들과 만났다.


대간러들도 그 운무속으로 파묻혀 점점 그 속으로 동화되어 갔고 미세한 물분자들은 내 안면을 수없이 때렸다. 그 안개비들은 살갑게 내 피부에 와 닿았고 구름비인지 안개비인지 점차 햇갈라는 상황. 점점 정신은 더 혼미해져 갔고 와중에도 안개비와 나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다가서면 어느새 저멀리 달아나 버리고 멈춰서면 다시금 다가오고. 내 마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심연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계속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계속해서 날 괴롭혔다.

KakaoTalk_20250807_143627268.jpg 산오이풀이 근육질의 마루금을 향해 강한 퍼포먼스를 날려주고 있었다.

횡경재 지나니 길은 두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또 선택의 순간이 또다시 날 시험에 들게했다. 살면서 원치않는 수많은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나. 잘한 선택인지 잘못된 선택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정치권은 무수히 부채질해 댔다. 그들은 마치 다른 리그같았다. 당리당략에 따라 철저히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향해 외쳐대며 여론몰이를 해갔다. 난, 두길을 동시에 걸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방향키를 과감히 좌로 선택했다. 회색같은 좌와 중도같은 좌.


때마침, 키큰 신갈나무 두그루가 껴안고 서 있었다. 두나무가 하나같기도 아닌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오랜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인지. 혼인목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부부인지, 연리목인지 알 순 없었다. 나무들도 외로울 뗀 이렇게 서로 등을 기대며 사는거구나 마음 찡해졌다. 힘들때 이렇게 몸 기댈 상대가 있다는 것도 분명 행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청설모 한마리가 땅에 떨어진 잣 열매 하나를 들고 가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도 놀라고 청설모도 놀랐다. 괜히 뻘춤해진 그는 나무위로 금새 올라가는가 싶더니만 다시금 멈춰서서 한참을 나를 째려보다 사라졌다. 혹시 내가 지나가는 소리에 방해라도 받은 걸까. 그는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니 다신 지나가지 말라는 그런 무언의 메시지같았다. 순간 미안했다. 나쁜 뜻은 결코 아니었는데. 오해였다고 귀뜸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내 눈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후였다.


처녀치마 외로이 땅바닥에 몸을 바싹 기대어 누운채 안개비와의 외로운 싸움 중이었다. 그 무엇이 두렵고 부끄러워 그토록 수줍어 하는 건지. 순간 난, 가슴이 여미고 숨이 약간 흐트러짐을 느꼈다. 그러는 중에도 마루금은 거리가 한올한올 좁혀져 오고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도착한 지봉. 난생 처음 와본 산인데 마치 예전에도 몇 번 와 보았던처럼 마음 포근했다. 마치 소싯적 동네 뒷산에서 땔감하며 지내던 그런 산처럼 안온하기만 했다.


그땐 뭐든 좋았다. 땔감하러 가다 말고 칡뿌리를 캐서 한뿌리 입에 가득 베어물고 자랑스럽게 귀환하던 모습들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건데, 그 시절 난 참으로 고집불통인 사람이었다. 삶은 늘 쉽지 않았고 하는 일마다 베베 꼬이기만 했다. 한고비 넘었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또다른 위기들. 아픔은 늘 예고조차 없이 다가왔다. 맨탈 슈퍼을인 나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고 어떤때는 깊은 상처가 되어 덧나길 여러번. 특히 가까운 사람의 말한마디는 날 처참하게 무너지게 하기도 했다.


이젠, 고만고만한 봉우리 세개만 더 넘으면 되는데. 오름길엔 점점 숨이 차올랐다. 내림길은 발목과 종아리가 심하게 아려왔다. 근육완화제를 꺼내 뿌려주었다. 점점 에너지가 고갈되어가고 있는 내가 느껴졌다. 몸이 신호로서 보내주고 있는 진실의 소리. 어찌보면 내 몸도 그렇게 자연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건 아닌지 모를일이었다. 신갈나무 숲이 기다랗게 끝없이 펼쳐졌다. 운무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았다가 중간중간에 소나무들도, 잡목들도 나타났다 또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비오는 숲은 싱그럽고 고요했다. 삶에 대해 초연하고 정직하고 순결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오직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뭇 정치인들과는 달랐다. 공정과 상식을 외쳐대고 새털처럼 가벼운 세치혀로 내뱉는 그들의 언어와는 품격이 달라보였다. 약속은 마치 지키지 않기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헌신짝 버리듯하는 그들의 언어와는 판이하기 달랐다. 숲의 왕국에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걸 주장하는듯 처연했다. 굳이 인간들처럼 오래 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KakaoTalk_20250807_143702475_01.jpg 어머니 품속같은 꽃잎과 꽃술들

나무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들을 생각하며 또, 또 걷는다. 분명 길은 걸은 만큼 한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다는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수없는 오름과 또 내림. 어떤때는 잔잔한 오름이었다가. 또 어떤때는 집채만한 언덕이었다가 마치 태풍때의 성난 파도처럼 널뛰기를 해댔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두둥실 떠다니다 내 발길이 닿은 곳은 어느새 대봉. 서서히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음도 느껴졌다. 내리막 도중 달걀버섯 한송이 아리따운한 몸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내일 모레 시집갈 시골처녀의 입술처럼 곱고 아리따웠다.


걷는내내 분위기는 넉넉하고 여유로웠지만 어느곳하나 만만했던 곳이 없었던 덕유능선. 하지만 나에게 풍요로운 한아름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마음부자가 되어 있었던 것. 눈부실정도의 행복에 취해 걸었고 그만큼 육신은 피곤하였다. 월성재도, 동업령도, 백암봉도 이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먼 발치에서 그져 그리움이 되어 있었고 언제 다시올 수 있을지 가늠조차도 되지 않았다.


마지막 봉우리를 넘는데 발걸음의 속도가 자꾸 늦어졌다. 마음은 바빴지만 육신은 자꾸 애가타고 있었다. 아늑해진 마루금길. 나비 한마리 퍼득이며 어디론가를 향해 날아갔다. 난, 무의식적으로 파랑새를 찾듯 뒤따라갔고 그는 짝잃은 부전나비였다. 그녀와의 줄다리기가 한참 더 지속되었지만 도무지 인증샷 찍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얄미운 그녀다. 아직 몸과 마음을 내놓을 준비가 되지않은 건지 잠깐 한눈 판사이에 어디론가 사랴져 버렸다.


머무를 곳 찾아 어디론가 떠나갔겠지 싶었다. 어미찾아, 천생배필찾아. 구름비따라 안개비따라 정처없이 떠다녔더니 어느새 빼재였다. 거짓말 같았다. 어제의 근심도 내일의 막연함도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다. 지금의 황홀함에, 내일의 설레임에 그져 취할뿐. 오늘이 세상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하지 않았는가. 끝이 없을 것 같던 마루금길에도 결국 끝은 있었다. 괴로움이 깊어질수록 마음만큼은 더욱 단단해져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2주간의 긴긴 기다림속에 덕유평전은 나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걸 내어주기도 했다. 좋은사람들산악회 대간 73기,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과 정체성이 듬뿍 깃든 대간 마루금을 완주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을 통해서 점점 더 동질감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여성대장님의 리더쉽과 넓은 이해심도 한몫 하였다.


빼재약수터는 속세의 삶들로 분주했다. 몸과 마음도, 심지어는 영혼까지도 축 가라앉았던 이번 산행은 나에게 많은 숙제도 안겨주었다. 체력의 보완이 절실했다. 점점 흔들리는 멘탈의 가벼움도 극복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지나가버린 수마가 잠시 주춤해지고 찜통더위가 점점 기승을 부려대던 그 무렵. 대기 중 가득찬 수증기들로 인해 내 몸은 마치 물먹은 하마처럼 축축 늘어져 가던 그런 때 였었다.



걷는게 왜 좋은건지
묻거든



어느날, 사이버공간에서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해 왔다. 왜 힘든 산을 그리 오르는 거냐고. 산이 왜 좋은거냐고. 그땐, 그냥이라고 대답해 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다. 결국,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위한 나만의 자구책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오늘을 허투루 보낼 수 없어서 였기도. 회색도시의 기계적인 삶에서 벗어나 점차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결국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내가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힘이 닿는데까지 최선을 다해 걷고자 할 뿐. 물론 체력 보충도 필요하다. 이곳을 함께 걷고있는 모든 대간러들도 아마 같은 생각일 듯. 난, 걷는게 그냥 좋다. 산책이든 일반산행이든. 아니면 대간종주이든. 왜 그리 좋은거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 내 얼굴에 비추인 미소가 대신 말해주는 거라고.


단지 내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내 육신이 진부령에 닿는 그 날. 후손들에게 나의 꿈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이끄는 힘이자 지치거나 포기하지도 않고 쭉쭉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KakaoTalk_20250807_143456546.jpg 우중버섯처럼 빠곰이 올라와준 달걀버섯

소슬 바람과 이름모를 야생화의 속삭이는 소릴 들으며 걸었다. 안개비와 구름들, 나뭇잎, 새, 곤충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도 귀 기울여 주기도 했다. 수많은 사건, 사고와 다툼, 갈등으로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속세와 달리, 이곳 덕유평전 마루금은 마치 딴세상인 것처럼 황홀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산행하는 날과 세속에 있던 날들을 잠시 비교해 본다. 방콕했던 날들은 웬지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은 엉켜버린 실뭉치처럼 어지럽기만 했는데 그러나 산은 전혀 아니었다. 내가 걸은 만큼 반드시 댓가가 뒤따라 주었고 우린 단지 지나치며 이산화탄소를 뿜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거기다가, 성취감과 안도감까지 덤으로 얹어주었으니 일석삼조가 아니었을지, 그야말로 온전함이 가득했던 하루였지 싶다. 그래서, 난 늘 산에 있어야 했고 그것이 자꾸 내가 산을 찾는 이유이기도.



꿀잠이란



오늘, 하늘길에서의 10시간. 생각보다 길었고 몹씨 피곤하고 더딘 여정이었다. 뻐근해진 팔다리가 심하게 쑤시고 아파왔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얼굴엔 화색이 번즈르 해졌다. 벌써부터 2주후의 산행이 또 또 기다려진다. 중독이다. 팔다리, 어깨, 심장따위 아예 고려 대상 아니었다. 어느덧 무박산행 루틴의 포로가 되어 버린 나. 이를 어떻하나.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니.


어젯밤 모처럼 꿀밤을 보냈다. 난, 파랑새가 날아다니는 어느 숲속을 해매고 있었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대간길. 그러나, 한발두발 걷다보니 결국 끝은 있어 주었다. 오르막 뒤, 또 내리막, 수많은 잡목과 잡풀들을 헤치며 나아간 후의 이 황홀감. 사람 키만한 조릿대가 내 어깨를 수없이 때려대고 구름비를 헤쳐나오며 지나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하다.


꿈속에선 내가 덕유의 주인공이었다. 저 운무를 타고 덕유 평전을 날아가고 있었던 나. 결국, 꿈을 꿨더니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어 있었다.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 개었다. 귀경길, 서쪽하늘엔 해가 늬엿뉘엿 기울고 회색 구름뒤에 숨어서 오늘을 마감하고 있는 중. 그렇다고 태양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오늘 할일을 하지 않은것이 결코 아니었으리. 행복이 내 마음 깊은곳에 스르륵 스며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13 덕유산을 떠나던 날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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