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룡고개 ~ 월성재 2부,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그렇게 남덕유산 서봉 오르는 어느 모롱이에서, 난 점점 영혼잃은 미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게 남은 건, 고작 체리 한 주먹과 물병하나. 하지만, 오늘의 미션은 반드시 수행해 내야한다. 계속 걸어야 하는 이유는 넘치고 또 넘쳐났다. 서봉을 넘고 남덕유산 정상을 거쳐 황점마을까지 가야만하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
약 10킬로미터 정도의 남은 거리가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감정이 점점 흔들거린다.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 그 와중에도 난 파노라믹하게 펼쳐지는 운무들을 바라보며 애써 여유로운 척 주변을 탐색해 본다. 저 운무의 끝은 어디일지. 본격적인 사투가 펼쳐지기 직전인 이 엄중한 상황에. 비상탈출로 마져도 완벽히 막혀버린 위중한 이때 여유로움이라니.
마침, 스마트폰에서 혼자가 아닌 나, 란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그래, 혼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좋치. 힘들때 살짝 기댈수도 있고, 또 내 진부한 이야기도 진심으로 들어 줄 수도 있을 테니. 노랫말처럼 난 혼자가 아니야, 라며 목놓아 외쳐보지만 결국 이 산중에 난 여전히 혼자였다.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라고 했지만. 아무리 하늘을 수없이 쳐다봐도 흔들림은 멈추지 않고 전혀 내 안에선 어떤 흥조차도 나지 않는다.
선택은 오로지 하나다. 앞만보고 걸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 단, 남덕유산 거치지 않고 바로 황점마을로 직진하는 방법이 하나있긴 한데. 그것마쳐도 썩 좋은 묘책은 아니다. 어찌됐든 당장 서봉까지 올라채야만 가능한 상황. 운무속에 묻혀버린 서봉과 남덕유산을 번갈아 바라본다. 마치 어서오시라, 고 나에게 손짓하는 듯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언감생심.
한숨과 시름은 깊어만 가고, 하늘은 온통 곰탕으로 도배된 현실. 내 몸과 마음은 온통 찌푸덩한 상황이 지속된다. 다시금 배낭을 풀었다. 아차, 마침 기정떡도 하나 있었지. 얼어있던게 때마침 서서히 녹고 있었다. 게걸스럽게 몇 입에 먹어 치웠다. 지금부턴 정글의 법칙만이 유일한 살길. 무조건 닥치는대로 먹어주고 닥치는대로 움직여줘야 했다. 체리도 반주먹 목에 집어 넣어주었다.
그리고, 아름드리 소나무 줄기에 기대어 눕는다. 근육의 피로가 조금이라도 풀려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내가 마루금길을 걷고자 처음으로 꿈꾸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몇 년전 산행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한 지인분으로부터 얼떨결에 들은 이야기, 우리 대간한번 타볼까? 그게 불씨가 되어버렸다. 그후, 내 가슴엔 어느새 불길이 되어 활활 타고 있었던 것. 내 마음은 이미 지리산 천왕봉지나 덕유산과 소백산, 대청봉을 거쳐 설악산 신선봉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운명은 그런것이었다. 그렇게 어느날 소리도없이 나에게 다가와 마음 한켠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 잔잔하던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그 한마디가 시가 되다니. 두달전 천왕봉에 올랐을 땐 이미 내 마음은 진부령까지 도착해있는 줄 착각까지. 그랬던 나에게 대간 사춘기가 벌써 와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아름드리 소나무는 내 마음 알까. 비몽사몽으로 있은 20여분이 지난 후 또 얼마간의 시간이 더 훌쩍 지나 버렸다. 그 사이에 대간러 후미분 몇 분도 지나가고 혼미해졌던 정신이 어느정도 돌아왔다. 피로도 어느정도 풀리는 분위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마른 바위위에 며느리밥풀꽃 몇 송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연분홍 꽃잎위엔 이슬이 아슬아슬 맺혀있고 하얀 밥풀 두개가 간지러지듯 드러나 있었다. 두살베기 애숭이 이빨처럼 하얗게 번질거렸다. 네가 바로 상팔자로구나. 난,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데. 처음 만났을때 밥풀이 하나로 보였던게 어느덧 두개로 보였다. 그렇다면, 지금 출발해도 될성 싶은데.
드디어, 나의 생체리듬이 반쯤 정상으로 되돌아오자 더이상 오름짓을 지체할 순 없었다. 다시금, 출발이다. 남덕유산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한줄기 소슬바람 불어오더니 이내 운무들을 먼발치로 밀어내고 있었다. 애꿎은 원추리꽃만 바람에 흔들거리며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었고 산허리에 머물러 있던 운무는 능선따라 서봉까지 올랐다가 다시금 능선 너머 골짜기로 내려가 어느새 모습 감춰버렸다.
갑자기, 나도 그 운무따라 흘러가고 싶어졌다. 저기 바람처럼 흐를 순 있는걸까. 저 나무 잎새들처럼 흔들릴 순 없을까. 아니었다. 난, 흘러 갈 수도, 흔들릴 상황도 아니었다. 난, 내 두발에 의지한 채 한발두발 저기 운무에 파묻힌 서봉을 올라채야하는 미션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불과 몇 미터 걸어 주었더니 마침, 바람쐬러 나온 물레나물이 내 발앞에서 한껏 미모를 뽐내고 있다. 소싯적 어머니는 춘궁기에 물레나물 어린잎을 따서 나물로 해주시곤 했었는데.
또다시 점점 혼미해져 가는 정신, 얼마나 더 걸었던 걸까. 내 앞에 깜짝 모습을 드러낸 메시아. 솔나리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보았더라, 그러니까, 십수년은 거뜬히 지난 듯. 어느 뜨겁던 여름날, 홀로 영남 알프스 능선을 산행하다가 우연스레 만나보고 이번이 처음인 듯. 마음 초연했다. 필듯 말듯 내일, 모레 시집이라도 갈 처녀처럼 아름답고 청아한 포스.
그사이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만사 귀찮았던 일은 어느순간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져 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의 근육들이 제자리로 원대복귀한 것. 변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있는 플랫폼이 바로 요물이지 싶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떠오른 어머니 생각, 소싯적 내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산골 오지마을. 모친은 자식 8남매를 손수 키우시는데 전전긍긍 하시느라 애초부터 당신의 인생은 없으셨다. 그녀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거라면 장돌뱅이니 잡화상이니 닥치는 대로 거의 모든일을 홀로 해내셨던 억척녀셨다. 어느날 부친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그 고난은 극에 달하셨던 것으로.
기댈 언덕이 필요했을 그녀가 어쩌다 바라보신건 변변치 않는 시골집 마당 한켠 모퉁이에 심겨져 있던 나리 몇 송이. 나의 국민학교 시절 마당가에 나리꽃 몇 송이는 모친의 마음이자 영혼이었다. 그 후 남편을 가슴에 묻으시고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실때에도 그녀 옆을 유일하게 지켜준 건 나리꽃들이었다. 시골장에 갔다 돌아오실때마다 그녀는 꽃망울을 쓰다 심으시며 긴 한숨을 내쉬곤 했는데 그때 난, 그녀의 눈물을 첨으로 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사춘기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나의 사춘기와 나리꽃은 늘 중첩이 되어 있었다. 어떤 때는 나리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어머니의 분신같은
솔나리와 재회하며
일주일만 더 늦게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또 떠난다. 꿈같은 솔나리와 얼마간의 만남 이후 또 내 발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인정해야 했다. 아쉬움과 함께 마치 없던 힘이 불끈 솟는 느낌이다. 어머니의 마음까지 품에 안고 걷는다. 어느새 내 미션의 모토가 뒤바뀌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솔나리와의 헤어짐은 아쉬웠지만, 나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저 운무잡으러 서봉을 올라채야 했다.오르는 일은 점점 고행의 길이 되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달팽이 전략을 써보는 걸로 했다. 달팽이에게서 배워온 삶의 전략은 거짓말처럼 효과만점이 되고 있었다. 남덕유산 오르기전까지 말이다.
점점 산상화원이 펼쳐지는 마루금. 뚝갈, 비비추, 꿩의다리, 돌양지꽃, 물레나물, 쑥부쟁이, 범부채, 동자꽃, 박쥐나물 등 그야말로 고산식물원을 방불케한다. 한시도 한눈을 뗄 수 없는 상황. 이 명경을 보고 아무렇치도 않게 그냥 휙 지나가 버릴 수가 있다니. 내 손에 쥐어진 체리 몇 개, 물 한병 뿐일지라도 난 어찌됐든 이 자연의 주인공들과의 소통만은 거부할 수 없었다.
집나간 자아찾아 떠나는 여행길이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마 생에 내가 최초로 선택했던 길이자, 내가 간절히 원하던 길이었다. 그 지나던 길에 혹시 내 잃어버린 정체성이라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떠돌다가 말지라도 결코 후회하거나 외롭진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거친밥을 먹고 풀잎에 덜렁 누워 버릴지라도 내가 가고자 한 길을 내 맘대로 가고 있으니 오직 희열 뿐이다,
비비추들도 무리지어 가느다랗게 꽃망울을 터트려 주고 있었다. 이리저리 출렁이는 바람을 즐기는 듯. 코가 땅바닥에 닿을 듯 깎아지른 벼랑길에서 피워올린 야생화들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 어깨마져 들썩거린다. 마루금 길섶을 수놓은 수많은 자연의 주인공들. 나에게 행복을 주고 자유를 주고 설렘까지 가져다 주는 고마운 존재들. 비오듯 쏱아져 내리는 무수한 땀방울들을 먼 골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이 모두씻어준다.
때마침 범꼬리들도 춤을 춰댄다. 그렇다면, 나도 바람의 노래나 한번 불러 볼까. 세월가면 알게될까. 이 마루금이 나에게 들려주는 바람의 노래를. 긴알락꽃하늘소 한마리도 꿩의다리 꽃망울위에서 홀로 바람의 노래를 불러대며 산상 만찬을 즐기고 있는 중. 달팽이에게서 배운 삶의 지혜, 즉 느림의 미학은 점점 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고 야생화와 곤충들과 이곳 모든 자연의 주인공들은 빼어난 미모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립스틱짙게 바르고 나온 동자꽃. 점점 더 무아지경으로 빠져든다. 무심의 경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조금후 남덕유산 정상에서 탈수증이라는 증상이 오리라곤 생각치도 모른채 휘파람까지 불어댄다. 덕유산 7월의 여왕, 원추리는 화장도 안은 채 민낮의 얼굴로 온갖 미모를 뽐내고 비비추는 여전히 고개를 못들고 얼굴을 땅바닥에 쳐박는 중이다. 운무가 퍼붓고 간 그 수분때문일까. 아니면 수줍음 때문이었던 걸까. 어디선가 바람 불어와 물방울들을 제거해주니 비로소 서서히 제 얼굴을 들고 있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운무가 모두 사라져버린 서봉 정상. 그 자릴 은근슬쩍 차지해 버린 따가운 햇살. 한없이 너그러운듯 쭉쭉 뻗은 덕유능선의 멋찐 자태를 한동안 굽어 바라본다. 말나리도, 돌양지꽃도, 화알짝 미소로 화답해 준다. 아쉬움과 슬픔이 묻어나는 서봉. 이윽고, 이마에 송송이 맺힌 땀방울들을 닦아내고 수십개의 철계단을 내려선다. 순간,다리가 후들거린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남덕유산 정상을 올라 챌 수 있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황점마을로 직행하느냐. 갈등이다. 선택은 오직 나의 몫.
이제부턴 달팽이의 전략까지도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기적에 기대야하는 상황. 전두엽은 계속해서 오르라한다. 물론 반대파도 있다. 4불가론이다. 물도 없고 먹을 식량도 다 떨어지고 체력도 고갈되고. 마지막엔 의지마져도 땅바닥에 거꾸러진 엄중한 상황. 두다리와 심장은 둘이 합심하여 격렬히 반대시위를 외친다.
마치, 태업까지도 불사할 태세. 그러나, 내 인생의 총지휘자인 전두엽의 명령을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상황. 마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자세로 몇 걸음 걷다 하늘 쳐다보고, 몇 걸음 오르다 물 한모금 이런 식이다. 고무줄거리는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 날 조롱한다. 서봉정상에선 한달음에 다가설 거리로 보였지만 가도가도 끝이 없다. 문제는 물이다. 생명의 원천인 물분자. 아껴서 마셔야 한다. 불안이 지속된다. 내 안에선 아무런 여유조차도 느껴지지가 앉는다.
걷는데도 내가 없고 오름짓에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 열씸히 두발을 내딛는데 내가 없다니. 잃어버린 영혼찾아 떠난길에 날 발견할수가 없다니. 천신만고끝에 오름과 쉬다를 수십번 반복한 끝에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남덕유산에 도착했다. 환호했다. 모든게 끝난거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남덕유산에 걸려있던 운무가 서봉위로 옮겨 가 버렸다. 마치 나 잡아보라는 듯 조롱하는 듯한 태도다. 산행 잘하시네요. 프로냄새가 물씬 납니다요, 라며 날 놀리는 듯했다.
난, 맘껏 즐기려했는데 늘 애숭이였고 한낱 등린이에 불과했다. 죽을듯 말듯 헤엄쳐 빠져나오려 했지만, 땅바닥에서 생명을 다해 발버둥치는 어느 풍뎅이처럼 난 그 자릴 맴돌뿐이었다. 날개를 펴서 훨훨 저하늘을 훨훨 날고 싶었지만 날개마져 그 기능이 다하고 있었던 것.
남덕유산에서 바라본 조망은 눈에 담고 또 마음에 담아도 가히 환상적이었다. 천사의 뷰가 따로없다. 발아래 쏱아지는 연초록의 숲을 굽어본다. 숲이 주는 싱그러움에 연신 감탄사가 절로 난다. 숲들과 골들과 꽃들이 내뿜는 향기들을 바람이 몰고왔다 또 사라져 가기를 여러번.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다. 인증샷 몇 장 남기고 일단은 서둘러 내려서려 했지만, 엎친데 겹친격으로 이젠 종아리가 말썽이다. 쥐가 나려는 건지.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배낭속에서 근육이완을 위해 멘소래담 스프레이를 꺼내 연거푸 뿌려주었더니 겨우 걸을 만 해졌다. 이윽고, 서봉을 바라보니 방금전까지 그 봉우리에 걸려있던 운무가 금새 구름으로 변했다. 진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배낭속에 마실물이 몇 방울밖에 없다. 아끼고 또 아껴야 한다. 까짓것 정신력으로 버텨보지. 설마 죽기야 하겠어.
가다보면 계곡물이라도 나올테지. 내 안에선 벌써 탈수란게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는데 내 안테나가 조잡하여 미쳐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야생화에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영혼을 다시금 되찾아야 했고 우둔하게도 내 몸이 보내주는 경고신호를 무시한 대가는 참혹했다. 내림길 종덩굴이 이쁜 화장까지 한채로 자기에게도 관심좀 가져 달라고 애원하듯 쳐다 보았지만 난, 귀차니즘에 이미 노예가 된지 오래 되었다. 단지 물이 필요하였다. 날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몇 모금의 물분자 뿐.
내려가는게 아닌 그져 내려가지고 있는 상황.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화양연화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져 야생화는 기본이고 하늘도 바람도 자연도 모두 내편이 되어줄 줄만 알았다. 대간러가 되면 마음부자는 당연지사로 알았다. 정확히 지리산을 떠난지 2개월도 안되어 처참히 그 꿈들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무모한 도전, 냉혹한 현실. 대간러가 더이상 내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없었다.
대간러란 소리 안들어도, 산행 슈퍼을이라도 좋다. 난 그냥 이 순간 아무것도 안하고 싶을 뿐. 지금의 난 속세가 무지무지 그립다. 생수 맘껏 마실수 있고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 뒤에 숨어 시원한 수박 한덩이 썰어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볼 수 있는 그곳이면 따봉이었다. 열정만 가지고 제대로된 준비조차도 없이 시작한 대간 종주길. 흐지부지가 될 이 상황을 난 인정해야만 할까.
마음속에서 원인모를 원망들도 쌓여갔다. 그 원망들이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외쳐대고 있었다. 내가 나를 배신한 상황. 하나님! 부처님! 천지신명! 이시여 저에게 한모금의 물을 주세요. 그렇게 반쯤 혼이 나간채로 걷고 있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갈 무렵. 어느순간, 거짓말처럼 내 앞에 천사가 나타났다. 메시아였다. 난, 순간 내 두눈을 의심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게 하나님일까. 아니면 부처님이실까. 천지신명님이실까. 난, 전생에 착한일을 많이 했던사람임에 분명해 보였다. 나의 절절하고도 애절한 바램을 들어주신 것. 좋은사람들과의 인연은 그야말로 아모르파티였다. 급경사 내리막길, 데크로 만든 평상 모퉁이에서 오늘 함께 산행중이시던 어느 일행께서 손수 얼려오신 수박을 막 드시려던 찰나.
와,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어느새 눈은 반쯤 감겨져 있었는데. 패잔병처럼 지나가는 날 부르시며 수박 좀 드시고 가라는데. 이게 생시인지 싶었다. 이걸 단방에 덮석 물어야 하나. 아니면 한번 빼야하나. 그러나 내 정신은 온전하지 못했다. 반쯤 집 나가있는 상황.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의 속도로 얼린 물덩어리를 하나 목에 집어 넣었다. 이젠, 살았다 싶었다. 완전 해방이 왔다 생각했다. 수박이 내 희망이 되어 주었다. 좋은사람들산악회는 나에게 오아시스가 되어 있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플랫폼의 인생여행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내 몸을 구성하던 세포들의 아우성 소리들. 그건 절규였다. 뭉크가 그렸던 그 절규. 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그렇게 집나간 수분들을 보충해 주고 다시금 내려서는 길은 그야말로 꽃길이 되고 있었다. 내 안에 다시 집나간 내가 들어와 미소짓고 있었다.
나무들의 응원소리를 들으며, 이십여분 더 내려가니 계곡이었다. 정신없이 뛰어가 물통에 물을 넣고 단숨에 또 들이켰다. 몇 분후 하늘을 보았다. 흐림이던 하늘이 어느새 쪽빛하늘로 둔갑되어 있었다. 갈색으로 보이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초록으로 반짝거리며 광합성을 열씸히 해대고 있었다.
일상은 별일없어야
행복하고
여행은 별일많아야
행복하다던데,
사후 약방문이된 플랫폼의 좌충우돌 인생이야기. 그 끝은 결국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되었다. 날씨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준비 부족이 너무도 완벽했다. 하산후 그 메시아분께 감사의 의미를 전달했다. 맥주 몇 병과 안주 조금. 약소했지만 그거라도 전해 줄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이고 다행이었다.
여행은 별일 많아야 행복하다, 라는 말, 이제부턴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별일이 너무 많아서 무지 불행한 여행이 될 뻔했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별일 없어야 행복이다,라고 떠남의 목적을 바꾸기로 했다. 추억 한보따리 가슴에 안은 채 오르는 귀경길. 멀리서 일곱빛갈무지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오늘의 실수를 거울삼아 다음 산행땐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 내 오늘 걷는 이 길은 비록 느리고 서툴고 어눌했지만 어찌됐든 내 소중한 삶의 흔적들이다. 그 궤적들이 모이고 모여 내 인생이 되고 훗날 왁자지껄 그 길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해 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어떤 감정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으며 단단하게 나를 지켜낼 수 있는 품격있는 날 기대해도 될까. 벌써부터 다음 구간이 무척 기다려진다.
플랫폼의 좌충우돌 백두대간 도전기는
이어서, 11 무룡산 원추리 품어안고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