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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ug 02. 2021

아프리카 모로코를 향해

2018년 스페인 + 포르투갈 + 모로코, 세 번째

8시 10분에 호텔을 떠나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말썽 많은 지브랄타 해협을 만났다. 스페인 함부르크 왕조의 결손으로 유럽의 여러 귀족들 사이에서 스페인의 왕조를 이을 왕권 점유 다툼이 벌어졌다. 영국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건축한 루이 14세의 손자가 패권 다툼의 승리자가 되어 스페인 왕조의 계승자가 되었다. 그 대가로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군사적 요충지인 지브랄타 요지를 영국에 내주었다.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진입하는 입구에 위치한 지브랄타 해협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면 누구도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건널 수가 없다. 이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면 수 개월을 배로 달려 희망봉을 지나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야만 향신료의 나라 인도로 가거나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이 절대적 위치의 지브랄타를 회수하려는 스페인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영국은 육해군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스페인 최남단에 위치한 따리페는 아프리카 최서쪽의 모로코와 이어주는 항구

스페인 최남단에 위치한 따리페는 아프리카 최서쪽의 모로코와 쾌속선으로 45분 만에 이어주는 항구이다. 스페인에서 불과 13km 떨어진 곳에 모로코가 있다. 지중해의 아랫입술에 해당하는 매혹적인 모로코는 긴 겨울로 우울한 겨울을 보내야 하는 유럽인에게는 최적의 휴양지이다. 대서양의 온화한 기후, 태양과 낮은 물가는 모로코의 2,200km나 되는 서쪽 해안가 곳곳에 유럽인의 휴양마을을 조성했다. 중동국가와 정치적으로 마찰을 겪고 있는 미국인은 감히 중동 여러 나라를 관광할 용기는 못 내고, 대신 모로코를 방문하여 아랍문화를 체험하고 이질적인 생활을 맛본다. 개발도상국으로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관광객이 쉽게 이국땅 여러 곳을 접하게 한다. 내년쯤에는 프랑스와 합작으로 건설 중인 고속전철 떼제배가 개통된다고 하니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울 것이다. 동원산업 등에서 참치잡이를 위해 왔다가 정착한 분들을 포함하여 우리 교민은 600여 명에 불과하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계속  늘고 있으니 이곳에서 관광 가이드로 직업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한국인 처자가 배에서 내리는 한국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국땅에서의 새로운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모로코는 한반도의 3배 면적에 인구 3,300만 명. 모하메드 6세의 통치하에 아랍인 55%와 원주민 베르베르인 44%의 모슬림이 모여사는 입헌군주 국가이다. 평균 월급이 20여만 원에 불과하지만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식량이 풍부한 모로코인은 골격이 크고 잘생긴 미모를 가졌다.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이들에게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정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밴츠를 타지 않고 구찌를 입지 않더라도 이들의 행복지수는 높다. 얼마나 영양상태가 좋던지 남자 화장실 소변기가 높게 달려 있어서 동양인은 앞 발꿈치를 세워야 겨우 실례를 할 정도로 장신들이다.      


로마의 지배, 중동에서 세력을 떨치고 일어선 아랍의 오랜 통치, 그 외 많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받아온 중에도 베르베르인의 강한 독립성은 자신들의 고유의 전통과 문화양식을 지키게 하셨다. 19세기 여러 유럽 상인의 영향에 이어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식민지배 쟁탈 중 1912년 프랑스가 대부분의 모로코를 점령하게 되었다. 술탄 무하메드 5세가 1956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현재 무하메드 6세의 통치하에 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6년 이전에는 비자 없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었는데, 이때 양 국가에 살던 모로코인과 그 후손들이 지금도 프랑스와 스페인에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고향 모로코에 살고 있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수입 일부를 보내서 가난한 대가족을 부양하는 의무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 모로코인은 14살이 되기까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의무적으로 배우고 있다.       

이동 중에 차를 멈추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던 곳인데, 아프리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조성된 시설과 조경을 갖추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내내 대서양의 아름다운 쪽빛 바다와 광활한 평지가 펼쳐지고 유럽인의 휴양지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는 뚜르 핫산이 착공한 미완성 회교사원 첨탑이 있다. 로마인이 지은 건축물의 기둥을 뽑아와서 야자수 숲을 의미하는 무수한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을 짓는 도중 1755년 발생한 대규모 지진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다. 지금은 첨탑과 기둥이 있고, 옆에 현 왕의 아버지 무하메드 5세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견고함을 더하기 위해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 놓은 두꺼운  진흙으로 만든 외벽, 로마식 기둥과 첨탑이 남아 있다. 사방 입구에 전통 복장을 입은  군인이 지키고 있는 무덤 내부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1755년 대규모 지진 발생으로 첨탑과 기둥만 남았다.  

                         

무하메드 5세의 무덤 내부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로코는 여러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네오 바르코 화가인 유진 드라크로아는  1930년대에 모로코를 방문하여 시장 생활, 할렘, 사자 사냥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영화의 메카 할리우드가 모로코의 신봉자가 되었다. 식민지 문화를 영화한 것을 필두로,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세 남녀의 삼각 애정관계를 그린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한 흑백영화 '카사블랑카'는 뭇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글래디에이터 등이 모나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인구 750만 명의 거대도시 카사블랑카는 현재에도 1930, 40년대에 프랑스가 계획하고 건설한 건물과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카사블랑카의 명물은 모로코인이 돈을 모아 근래에 지은 핫산 2세 회교사원이다. 6.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과 2.5만 명이 예배 볼 수 있는 세계 3대 회교사원을 보기 위해 저녁예배 시간에 맞춰 달려갔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시내의 교통혼잡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혔다. 신호등은 있으나 먼저 밀어 넣은 차량이 최고다. 트럭, 버스, 승용차, 오토바이 할 것 없이 무질서하게 비집고 달려가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유유히 빠져나간다. 4차선에서 버스가 U턴을 하는데도 차들은 경적 없이 기다려 준다. 틈만 있으면 언제든지 차 머리를 밀어 넣어도 모두가 용납된다.                             


회교사원은 지독히도 컸다. 건물  전부를 한 화면에 다 집어넣기가 힘들 정도다. 사원 내부는 모슬림이 아닌 외부자에게는 출입이 통제되어 외부에서 사진을 찍었다. 코레도바 사원같이 야자수 나무숲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터키 인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블루 마스크와 같이 실내 공간을 충분히 확보되고 아라베스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침 8시 10분에 스페인을 출발하여 모로코 여러 곳을 둘러보고,  카사블랑카 시내 호텔에 밤 9시 10분에 도착했다. 4성급 호텔이라고 하지만 쫄쫄거리며 나오는 수돗물로 겨우 샤워를 하고, 뒤척이면 떨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좁고 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어제저녁에 몸에 눌려 덜렁거리던 안경테  다리 하나가 완전히 부러져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안경테 하나로도 안경이 콧등에 얹혀 있어 앞을 보는데 무리가 없다. 다만 안경 위치가 자주 비뚤어지고  초점이 맞지 않아 어지럼증이 유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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