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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pr 14. 2022

제주 한라산 트레일링

영실 - 윗세오름 - 남벽분기점 - 윗세오름 - 어리목 입구

나에게 백록담은 다다르지 못할 장벽이었나 보다. 예전 어리목 입구에서 출발하여 한라산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백록담의 직벽만 바라보다가 영실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또 어느 해 겨울에는 성판악 코스를 선택하여 작정하고 새벽부터 눈 내린 한라산 절경을 향해 내달았지만, 정작 체력이 떨어진 친구가 정해진 12시까지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하지 못해서 포기해야 했다. 위험하게 눈 덮인 한라산을 늦은 시간에 내려오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서귀포 올레시장 근처 호텔에서 일박을 했다. 항공료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 값으로 복귀했지만, 호텔비는 여전히 기존의 반 값이다. 20여 km에 이르는 거문오름과 올레길 제7코스 트레일링으로 종아리에 알통이 배이고, 온몸이 찌뿌둥하다. 오랫동안 운동을 안 했는데 근육이 놀란 모양이다. 오늘 하루는 무리했다.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올레 시장에서 만나 함께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한 동행자와 택시를 타고 영실 입구로 향했다. 인적은 적었고,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잘 관리된 탐방로를 따라 걷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공기가 마음 깊은 속까지 파고들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한라산의 텃새인 오목눈이와 동박새의 맑은 새소리가 함께 등반했다. 일체의 소음이 없고 정막 할 정도로 고요해서 휘파람새가 귓전에서 지저귀는 듯이 새소리가 선명하고 경쾌하게 들렸다.

전날 강행군하여 몸이 무거워진 까닭에 발걸음 띄기가 쉽지 않았다. 위세오름까지 계단길이 연속된다. 높은 계단을 오를 때 허벅지가 당기고 떨렸다. 숨이 넘어가는 깔딱 고개 정도는 안 되더라도 인내가 필요한 구간이다. 숨을 내몰아 쉬고 자주 은 휴식을 취했다. 등산로가 파이는 것을 막기 위해 탐방로 바닥에 심은 울퉁불퉁한 화산암 돌이 발걸음을 지체하게 만들었다. 등산화가 아닌 트래킹 신발이라 발바닥이 아프고, 자칫하면 딛어 발목을 삘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으로 발 내딛기가 조심스러웠다. 숨을 몰아쉬면서 영실기암과 오백 나한에 깃던 설문대 할망의 슬픈 전설을 기억해 냈다.  

탐방로와 오름 여기저기에서 겨우내 녹지 않은 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4월의 햇살은  바람막이를 벗기고, 사람들의 피부에 내려앉자 얼굴을 붉게 익힐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계곡과 그늘 속 눈을 녹일 정도로 기세를 떨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윗세오름에서 잠시 쉬면서 식사대용으로 사 온 오메기  떡을 먹는 동안 바람이 쌀쌀하다고 느껴졌다.

더러는 하얗게 고사한 나무들이 무리 지어 있는 푸른 구상나무군락을 거쳐, 낮은 키의 조릿대가 펼쳐지는 벌판을  지났다. 그리고 웅장한 위세를 떨치며 우뚝 서있는 백록담의 남쪽 직벽을 만났다. 수 천 개의 기암괴석과 석탑이 하늘로 솟아 있었다. 철옹성같이 굳게 서 있는 남서벽 일부가 무너져 내린 흔적이 보였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자연스럽게 붕괴되었을 것이다. 누구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백록담 직벽을 왼쪽에 두고 걷고 걸어서 남벽 분기점을 찍었다. 더 이상의 등산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출입제한구역을 알리는 입간판을 보고 발걸음을 윗세오름으로 되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용출수가 솟아나는 방아오름 샘이 눈에 띄었다. 남벽 분기점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탐방로는 비교적 완만해서 여유로웠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으로 오르는 길이 가장 완만하고 쉬운 길인 모양이다. 이 구간에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어서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필요한 자재와 식품을 나르고 있었다. 트래킹 중 발을 삔 사람들은 모노레일을 사용하여 내려올 수도 있을 것 같다. 화산암 돌길과 테크 길을 따라 내려오다 사재비동산 샘터에 들려 목을 축였다. 백록담 만설이 녹아 솟아오르는 샘치고는 물맛이 썩 좋은지 모르겠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삼다수 물맛과 같다고나 할까?


올레길 제7코스 트레일링을 마치고, 올레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이 동행자가 되어 한라산을 올랐다. 동행자가 생겼으니 우도 해안길 트래일링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한라산 트래킹을 선택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대의 보폭을 의식하며 함께 걷는 것의 의미가 컸다.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혼자 걷는 것보다 더 빠르게 걸을 수 있었고, 혼자라면 포기했을 곳까지 가보기도 했다. 힘이 되었고 격려가 되었다. 용기가 다.


영실, 어리목 탐방을 통해 한라산의 넓은 품과 웅장한 기세를 보고 느꼈다. 살아가다가 어느 날인가 조선 중기 때 시인 임제가 남긴 시제, “옛날에 사냥꾼이 한라산 정상에 올라 사슴을 쏘려다가 잘못하여 활집을 스쳐나가 하늘의 배를 쏘았다.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주봉을 뽑아 버리니 움푹 파인 데가 백록담이 되었고, 뽑은 봉우리는 대정 남쪽으로 옮겨 놓았으니, 산방산()이라고 부른다”라고 노래한 백록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기회가 주어지겠지.   


한라산 영실, 어리목 탐방 안내도
실제 트래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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