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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Apr 07. 2022

제주 올레길 제7코스

제주도 여행 패턴이 많이 변했다. 신혼 초에는 보말 국수, 몸국, 갈치구이, 말고기 코스 등 주로 맛집을 탐방하는 여행을 즐겼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소인국, 미로공원 등 테마파크를 찾았다. 그 후 회사 업무차 수차례 단체 방문한 것뿐 제주여행이 한동안 뜸해졌다. 해외여행이 허용되면서 제주여행 비용보다 저렴한 동남아 등으로 날라 갔다. 해외여행에 익숙해지자 점차 유럽으로 발을 넓히고 북미와 남미의 세계적 명승지까지 여행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하늘 길이 막히고, 사람들은 다시 제주도로 눈길을 돌렸다. 이미 맛집과 테마파크를 경험한 뒤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제주의 자연을 발견했다. 자연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 중국의 원가계 장가계, 아르헨티나의 이구수 폭포 등 모두 자연의 걸작품 앞에서 우리는 넋이 빠졌다. 그리고 제주의 비자림, 사려니, 절물휴양림 등 숲길을 걸으면서 마음에 평화에 깃들고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깨닫는다. 마음과 육체가 함께 안식을 맞이한다. 마침내 여행의 진수는 거대한 인공적인 무엇이 아니라 신이 주신 그대로의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년 전 제주의 농촌 풍경, 초록의 숲길, 수려한 해안길과 비양도 섬을 보면서 거닐었던 올레 제14코스 트레일링이 떠올랐다. 함께 걸었던 친구와 아름다운 풍치 등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이번에도 제주의 올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20여 개의 코스 중 해안의 빼어난 절경과 자연생태길로 유명한 제7코스를 선택했다. 이번 여행은 출발지와 목적지가 다른 트래일링을 즐겨보기로 작정한 지라 차를 렌트하지 않았다. 버스로 이동하고 외돌개에서부터 출발하여 법환포구를 거쳐 월평까지 이어진 해안길을 걸었다.

처음 만난 것은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용암지대가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무너지고 홀로 남아 우뚝 선 20여 미터의 외돌개다. 이곳에는 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14세기 말 원나라의 목장이었던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적 목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최영 장군이 원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서귀포 앞바다 범 섬으로 달아난 잔여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물리쳤다고 해서 장군바위라고도 불린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피살된 고려말 충신으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최영 장군을 뜻밖에도 이곳에서 만났다.

칠레 피츠로이 트래킹을 하면서 먹었던 체리는 알이 굵고 달았다.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길로 안내해 주는 올레 리본을 따라 걷다가 무인 귤 판매대를 발견했다. 비닐봉지에 담아 천 원에 판매하는 귤이 마른 입을 적셔줄 것이다.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천 원짜리 지폐가 없었다. 그렇다고 오천 원을 돈통에 넣고 다섯 봉지를 가져갈 수도 없고, 외상으로 지불할 수도 없으니 구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제주 여행 때 호텔 앞 무인 판매대에서 집어 든 천 원짜리 귤 봉지에 담긴 쓰고 맛없는 하귤을 생각하면서 귤을 사지 못한 것을 위로했지만, 여전히 섭섭했다. 예전 칠레 피츠로이 트레킹을 하면서 길가에에서 농부가 파는 체리를 사서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검은빛깔의 체리는 알이 굵고 단맛이 강했다.

트레일링 중 여러 곳에서 작은 개울을 만났다. 강정 어느 깊고 넓은 개울에는 수박 향기가 나는 은어가 살고 있다고 한다. 민물과 바닷물이 조우하는 곳은 바다에서 수영을 한 후 소금기를 씻어 낼 수 있어 늘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돔베낭골 해안 절경지로 내려가는 도로 옆에는 한라산의 눈이 녹아 흐르고, 개울 끝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놀고 있었다. 그리고 개울가  옆에는 즐거운 하루의 기억을 담아 누군가에게로, 혹은 여행에서 돌아온 자신에게 편지를 부칠 수 있도록 빨간색 우체통이 여러 개 비치되어 있어 보기에 흥겨웠다.  

해안가 검은 돌이 만들어내는 물웅덩이와 아스라한 섶섬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트레일링을 하는 내내 옆에서 동행했다. 때로는 작은 언덕길을 오르고, 또 때로는 해변의 자갈밭에서 자연 속의 한 점이 되어 발걸음을 옮겼다.

노란 꽃, 하얀 꽃, 잎새 끝에 자줏빛이 더한 유채꽃

여러 곳에서 제주도를 떠올리게 하는 유채화가 만발하고, 하얀 나비가 꽃들 사이로 꿀을 찾아다녔다. 그동안 노란 유채꽃만 보아 왔는데, 이번에 하얀 꽃과 하얀 꽃 잎새 끝에 자주색이 물들어 있는 유채꽃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 고정관념으로 노란 유채화만 있다고 생각해 왔을까? 자연은 얼마나 많은 다양성과 변화를 허용하는지 알지 않는가? 인간의 편 가르기와 달리 자연 속에는 크기, 색깔과 생김새가 다른 생명체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 의미를 음미해 보아야 한다.             

해변로를 따라 개척된 올레길은 개인부지 통과 불허로 부득이 마을을 우회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아름다운 풍치를 독점하려는 인간들의 편협함이 속상하지만, 개인 재산권 보호와 사생활 침해라는 측면에서 용납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단지 트래일링하면서 자연 속으로 동화되는 마음이 마을을 우회하는 동안 다시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길처럼 굳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제7코스 중 강정마을을 우회하는 길에 제주 해군기지 건설로 빚어진 갈등과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장을 지나갔다. '맹꽁이와 붉은 발 말똥게가 살고, 마을 앞바다에 천연기념물 연산호 군락이 있다'는 환경보호단체의 기지 건설 반대는 군과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은 찬반투표로 마을 주민을 둘로 갈라놓았다. 수백 년 동안 함께 살아온 이웃들 간의 깊은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완성된 해군기지 건물 외벽에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새겨진 구호가 이들의 상흔을 더 아프게 부각한다.

옛날 달을 바라보는 정취가 일품이라고 '달을 바라다보는 곳'이라는 의미의 망다리(망달) 언덕을 지나, 해녀문화로 유명한 법환포구의 동가름물 빨래터를 지나쳤다. 해안로에 흩뿌려진 검은 돌 사이로 사람이 다닌 흔적이 반질반질하게 남은 바당올레를 거치고, 주상절리 앞을 지나 월평포구에 이르렀다. 월평포구 서쪽 끝 바다 저 멀리에서 삼방산과 이웃 산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하늘거렸다. 모양새가 이상하다. 두 개의 낮은 산 다음으로 산방산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앞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야 될 산방산 아랫부분이 선명하게 보였다. 두 번째 산도 제 모습을 다 보이고, 세 번째 산방산도 제 모습을 다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슨 조화인가?           

월평마을 '느리게 걷는 농장'을 지나 작은 슈퍼마켓에 들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마른입과 목을 축였다. 그리고 한 5분 더 걸었을까? 7코스 마지막 지점과 8코스 시작 지점을 알리는 표지석을 만났다.


이렇게 덜컹 끝나는구나.     


올레길 제7코스를 4시간 동안 홀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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