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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철 Jan 25. 2024

독자는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 속에 담긴 진실을 산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좋습니다 (1)

나이가 어릴수록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만든다고들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좋아하는 영화와 소설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매우 많습니다. 중요한 차이는 있습니다. 영화와 소설에서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그럴듯합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기도 하고 전체 이야기 구조 안에서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내기 때문에 허무맹랑하다는 걸 잊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는!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허무맹랑하다고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 각자의 경험이 담겨 있는 허무맹랑함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소설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소설은 거짓말입니다. 소설은 그 이름 자체가 픽션, 허구,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거짓말을 돈을 주고 삽니다. 정신 나간 겁니다. 저는 지금도 정신 나간 짓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돈 주고 산 것도 모자라 밤새도록 거짓말을 읽고 또 눈물로 베개를 적십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기도 합니다. 독후감을 말해줘야 하니까요!      


소설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소설이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소설을 사서 읽습니다. 왜 그럴까요? 소설을 산 독자는 거짓말을 산 게 아닙니다. 거짓말 속에 담긴 진실을 산 것이고 그 진실을 읽는 것입니다. 사실 그건 소설가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많은 가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말입니다. 작가는 허구를 통해 진실을 말한다고 합니다.

     

사실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해보죠. 소설의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일’, 즉 ‘사실’에 기반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가공하여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실제라고는 하지만 거기에 허구를 입혔으니까 결국은 허구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 허구를 통해서 진실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독자에게 전달되었을 때 독자는 감동받게 됩니다. 소설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시는 어떤가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2014: 12쪽)     


백석 님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앞부분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리다니! 인과관계는커녕 전혀 그럴듯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의 간절한 바람이 우주를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설가와 시인만 그런 게 아닙니다.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피카소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Amedeo Modigliani (1884-1920), Jeanne Hébuterne (Au chapeau), painted in 1919. 36¼ x 21¼ in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성을 보세요! 모두 긴 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이 길면 미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족이 여전히 있긴 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그러니까 카렌족처럼 목에 거는 링의 숫자를 늘리지 않는 한, 사람은 사슴같이 긴 목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의 여인은 모두 긴 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 사실주의 계열의 화가를 제외한다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화가는 없습니다. 화가 역시, 거짓을 통해 진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백석(2014).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시집. 파주: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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