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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철 Dec 04. 2023

투자 대비 성과 비교

한글 공부, 절대로 시키지 마세요 (4)

게젤은 틀렸고 우리 학부모들이 옳았습니다. 만 3세 아이도 한글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글 공부에 대한 학부모들 요구도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왜 유아교육기관은 학부모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걸까요?  

   

이번 이야기에서는 그 질문에 대해  생각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투자 대비 성과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 3세 유아도 한글 읽기와 쓰기를 익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버거운 일입니다.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데 익히라고 하니까, 아이 입에서 “내 이래가 살겠나!”와 같은 말이 나오게 됩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고생고생해야 한글 읽기를 ‘뗄’ 수 있습니다. 만 3세 때 100시간 들여 ‘억지로’ 한글을 떼지 않아도 초등학교 1학년때 10시간만 투자해서 한글을 깨칠 수 있다면, 어떤 게 경제적인 선택일까요?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이 규칙적인, 매우 과학적인 글자입니다. 한글은 매우 쉽기 때문에, 다른 언어에 비해 짧은 시간 안에 읽기와 쓰기의 규칙을 익힐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표기문자로 선정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논란이 있더군요). 우리의 선조들은 훈민정음을 만들 때부터 이미 그 점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훈민정음해례에 실린 정인지 님의 서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슬기로운 이는 하루아침에, 슬기롭지 못한 이라도 열흘 안에는 배울 수 있습니다(김슬옹, 2013: 204쪽).”  

   

훈민정음 해례에 실린 정인지 님의 서문 중 일부 (간송미술관 소장)


투자 대비 성과를 생각하면, 일찍부터 한글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성과’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글 읽고 쓰기를 빨리 깨치면 그림책도 일찍부터 혼자 읽을 수 있고, 그러면 결과적으로 이른 시기부터 언어적 이해력과 문학적 표현력이 증진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100시간 들여 한글을 떼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모음 결합방식을 익혀 인쇄된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언어적 이해력이 증진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읽을 줄은 아는데 자기가 읽은 글자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쓸 줄은 아는데 쓸 말이 없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이상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을 제가 다시 정리했을 뿐입니다. 1학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2학년, 3학년 그리고 고학년으로 가도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은 고학년으로 갈수록 오히려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읽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기도 하고, 글을 쓸 수는 있는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는 경향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한글 공부에만 매달린다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방식을 알고, 그 방식에 의해 인쇄된 글자를 소리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림)책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아이들은 독서를 할 때 의미를 발견하면서 읽어야 한다. (...) 독서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 이해와 어휘 구사의 습득보다 그것들이 나타나는 문맥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의미를 파악하려면 그 의미에 민감하고 그것을 추론하고 도출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추리는 글자 그대로 주어진 데서 암시된 것이나 함축한 바를 끌어내는 것이다. (서울교육대학 철학연구동문회, 1986: 34-35쪽).”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글 공부를 시킬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언어적 상상력, 문학적 표현력을 길러주면 어떨까요? 잘 아시다시피 어린 시기에는 상상력이 뛰어납니다. 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도와주면 어떨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유아교육기관에서 한글 공부를 시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① 철자법을 익히는 건 비교적 쉬운데 언어적 표현을 익히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린다.

② 유아기는 (언어적) 상상력을 길러줄 수 있는 적기이다.

③ 아이가 준비가 되었을 때 ‘형식적인 한글공부’시작하면 빠르게 마칠 수 있다.

④ 그러니 한글 공부는 조금 뒤로 미루고, 유아기에는 언어적 상상력을 길러주면 좋겠다.


이런 논리인 것입니다.

     



김슬옹(2013).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 표준 공역 시안. 청람어문교육학회, 2013/01 학술대회 자료집.  


인용한 내용은 훈민정음해례에 실린 정인지 님의 서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서문은 언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다양한 번역본이 있습니다. 제가 몇 개의 번역본을 검토해 본 결과, 김슬옹 님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여기에는 그 내용을 실었습니다. 원본은 “故智者不終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입니다.


영화, 나랏말싸미 (THE KING’S LETTERS, 2018년, 조철현 감독)에서는, 정인지 님은 한글 창제에 반대했던 유학자였고, 한글창제의 주역은 신미대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학계의 정설은 아닙니다만, 당시의  역사, 문화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저는 역사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여기에서 그 논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쩌면 하루아침에 한글을 배운 사람이 정인지 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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