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이야기에 싸우고 죽이는 내용이 등장한다면 많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건 좋은데 그 이야기에 이른바 ‘비교육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면 차라리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아이들 이야기에 부적절한 내용이 많습니다. 때로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똥이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합니다.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선생님이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공격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도 인간인지라 화가 나겠죠!
그래도 선생님이니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이들은 잘도 알아챕니다. 선생님이 언짢아할수록 공격의 정도가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도 공격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 이야기에 엄마가 죽는 내용이 담겨 있다면, 그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주기도 어렵습니다. 엄마가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데도 아이들 이야기에 그런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부적절해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똥도 중요할 수 있다는, 안도현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름지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똥’에 유의해야 한다. 절대로 ‘똥’을 무시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며, ‘똥’이라는 말만 듣고 코를 싸쥐어서도 안 된다. 똥을 눌 시간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똥을 괄시했다가는 얼굴에 똥칠 당하기 쉽다.) (안도현, 2009: 32쪽)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 1933-1963)가 자신의 똥을 통조림에 넣어 전시한 작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똥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똥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싸우고 죽이는 등, 부적절한 단어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부적절한 내용이 이야기에만 들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싸우고 죽이는 놀이, 아이들이 실제로 많이 하기도 합니다.
제가 관찰 연구를 나갔던 한 유아교육기관은 군부대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아이들의 놀이는 대부분 기승전전(戰)이었습니다. 어떤 놀이라도 결국은 ‘전쟁놀이’로 끝나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안 보실 때 전쟁놀이하는 건 더 재미있었습니다. 선생님 눈을 피해서 전쟁놀이를 하거나, 선생님에게 걸리면(?) 전쟁놀이가 아니었다고 둘러대는 것, 그것 자체가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했습니다. 숫자 막대가 비행기가 되고 돋보기는 헬리콥터가 되었습니다. 블록으로 칼도 만들고 총도 만들었지만,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면 다른 도구라고 우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비폭력적인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는 바람, 평화를 사랑하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기대. 그 바람과 기대를 모두 저버리고, 아이들은 폭력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역시 폭력이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이 안전함을 확인한다고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니까요. 이야기 속의 사람이 불행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즐거운 거라고요. (伊藤 俊治, 1997: 125쪽)
안도현(2009).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 서울: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