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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철 Feb 10. 2024

꽃잎 따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기

부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 어떻게 하죠? (4)

폭력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아이로 자라는 건 결코 아닙니다. 


영화, ‘화이트 노이즈’는 “영화에서의 자동차사고는 폭력일까?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내립니다. “영화의 자동차사고는 폭력으로 보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자동차사고뿐만 아닙니다. 영화에서의 폭력은 폭력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폭력적인 장면이 적절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 필요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정말이지 폭력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찾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끄럽게도) 폭력적인 영화만 골라서 봤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영웅본색’ 류의 홍콩 느와르가 유행하던 시절, 시작한 지 5분 안에 10명 이상 죽지 않으면 ‘비디오’를 갈아 끼우곤 했습니다. 


영화, '영웅본색(A Better Tomorrow, 1986년, 오우삼 감독)'의 한 장면


제가 어렸을 땐 생명존중에 대해 참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뭇가지 꺾는 것 정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돌팔매로 잡은 개구리 뒷다리를 연탄불에 구워 먹던 시절에는, 풍뎅이 머리를 돌려보거나 잠자리 날개를 조금씩 떼어가며 날리는 실험(?) 정도는, 까르르르 웃음을 자아내는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그렇게 무참하게 생명을 짓밟았던 친구 가운데, 제가 알고 있는 한, 흉악범이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그게 폭력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게 폭력이라고 이야기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폭력적인 행위'를 담은 '폭력적인 이야기'는 영웅담으로 둔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웅담은 더 심각한 폭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는 (폭력적인) 이야기가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폭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더욱 걱정됩니다. 폭력적인 이야기가 현실에서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런 경험을 한 아이가 공격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담은 이야기에 대해 너무 민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정말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뿐입니다. 


민감해야 할 것은, 폭력을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폭력에 대한 미화, 폭력에 대한 정당화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숲에서 꽃잎을 따면서 “미안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 말은 자기기만적인 정당화일 뿐입니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 청각 장애인 노동자 류는 누나의 신장 이식 수술을 위해 아이를 납치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누나는 자살해 버립니다. 이후 류는 아이를 무사히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아이가 물에 빠져 죽어버립니다. 복수심에 불타던 아이의 아빠는, 아이가 죽은 바로 그 강에 류를 데리고 와서 죽여버립니다. 죽이기 전에 아이 아빠는 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착하다는 거 안다. 그러니까 이해하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아빠는 류의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립니다.


이 장면까지 보고 저는 포즈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짧은 글을 써보았습니다.)


꽃잎을 따면서, 꽃을 꺾으면서 “미안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는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건데 미안하다고 이해해 달라고 말하면 안 된다. 내가 지금부터 너를 죽일 건데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차라리 그냥 죽이는 게 더 자비로울 수 있다. 


(이어서 쓴 글입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TV 옆에 꽃바구니가 있어서 써보았습니다.)


꽃다발의 꽃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생명을 잃은, 간신히 간신히 간신히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만 몸에 담고 있는, 그래서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죽음에 담긴 아름다움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살아있음의 아름다움과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꽃다발의 꽃은 살아있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폭력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아이로 자라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정당하지 못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경험을 많이 한 아이들이 폭력을 사용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 (Sympathy For Mr. Vengeance, 2002년, 박찬욱 감독)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 2022년, 노아 바움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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