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저에게 전화를 했더군요. 주말에 잠깐 들르겠다고요. “잠깐 들르려면 뭐 하러 와!” 말하는 순간 저 혼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말은 제 말이 아니었습니다. 작고하신 어머님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님은, 그렇게 잠깐 있다 가려면 오지 말라면서 눈물로 배웅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님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출장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들르고 싶었는데, 때론 부모님 댁에 잠깐 들르려고 일부러 여유 있게 출발하기까지 했는데... 잠깐 들르는 걸 못하게 하시니까!
정말 짜증이 났습니다. 며칠 동안 머무는 건 쉽지 않아서, 잠깐이라도, 어떻게든 만나 뵈려고 한 거였는데 그걸 못하게 하시다니!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가 어머님이 되어 어머님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전의 저는 어머님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저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타인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주제는 웬만하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항상 제 입장에서만 생각했습니다. 실상은 그랬지만, 마치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고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우리는’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아니 저는) 항상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의미 부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게 됩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이후 마지막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해하는 걸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해하기를 포기한다면 상대방과 나는 아무 관계가 아니게 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제 생각이 또 어떻게 변하게 될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 1992년, 로버트 레드포드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