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하는 삶
사랑이 거추장스러운 삶이다. 나와 비슷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여성에게는 더 그렇다. 혼자를 책임지기도 어려운 인생에 누군가를 들이는 것이란 꽤 불편하고 버거운 일이다. 나는 기혼에 임신을 준비하고 있지만 비혼과 비출산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앞선 세대가 경험했던 어려움을 직접 겪어보니 더욱 공감이 된다. 그들은 단순히 불편함과 의무감에서 벗어나려 혼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감내하지 않고 싶어 사랑도 결혼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힘찬 목소리의 가운데서 결혼을, 그리고 사랑을 예찬하는 글을 썼다. 사람으로부터 상처 받은 주제에 다시 사랑하고 싶어 몸부림쳤던 2016년을, 그리고 한 사람의 믿음으로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2019년의 기억을 썼다. 더 이상 우울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달 간 꾸준히 사랑과 결혼에 대한 과거를 곱씹었다. 그건 내가 쓴 모든 단어가 진짜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옥을 벗어난 것이 모두 남편의 덕인 것은 아니다. 나는 꾸준히 약을 먹었고, 운동을 하고 세 끼를 챙겨 먹는 일상을 지탱하려 애썼으며, 쉽게 상처 입지 않도록 마음의 방어 능력을 기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려는 내 마음을 붙들어 타이르는 데 최선을 다했다. 내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나는 그 덕에 자주 넘어졌다가도 그만큼 자주 일어섰다. 노력은 혼자 했으나 역경은 같이 넘었다. 확신하건데, 혼자였다면 아마 진흙탕에 코를 박고 죽었을 것이다. 외로움을 안고 태어난 나에게 그는 꽤 효과 좋은 처방이었다. 내가 혼자여도 행복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둘을 책임지기에도 넉넉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처방이든 아니든 내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는 그가 고마웠다.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보다 여행지에서 부딪힌 어려움 속에서, 그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누가 곁에 있는 것이 버겁고 부담스러운 날이 있었다면 언제부턴가는 그가 곁에 없다면 울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혼자로 완벽한 것보다 둘으로도 불완전한 그 모양이 더 마음에 드는 날들이었다.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도 언젠가 이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내게 상처를 안겨주면 어쩌나, 자기도 모르게, 잘못한 줄도 모르면서 한심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고 내게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품게 하는 사회가 싫다. 지금까지 보아온 모습에 비추어 보아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믿지만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사랑이 오염되진 않을까 우려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글을 썼다. 사랑이 내게 준 단단한 지지에 대해, 그 지지를 딛고 자라난 희망에 대해 썼다. 이제는 과거라 부를 수 있는 우울과 불안에 대해 썼다. 그 고마운 사실에 대해 쓰고, 지우고, 또다시 썼다. 쓸데없고 가치없다 치부되곤 하는 사랑에 대해 진실로, 최대한 정성스럽게 적었다.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오래도록 고민하며 적었다.
모든 우울에 사랑이 처방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약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던 나의 남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를 표하고 싶다. 되돌아보고 싶어지는 과거를 만들어 준 당신에게 전한다. 고맙다고. 또 고맙다고. 우울을 앓던 나를 이해하려 노력해주고 끌어안아 주어 고맙다고. 불신이 가득했던 과거를 모두 희미하게 만들어주어 고맙다고.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하게 해주어, 정말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