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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무 Feb 28. 2021

상남자가 되고 싶어도 패션은 1절만

지난주 내내 눈이 내리고 날씨가 흐렸는데, 오늘은 모처럼 해가 쨍하게 떴다. 햇살을 즐기기 위해 아내와 베를린 중심가(Miete)까지 산책을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패션 감각을 뽐내기 위해 검정 비니를 쓰고, 내가 좋아하는 모래색 재킷을 꺼내 입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선글라스도 꺼냈다. 선글라스는 동생에게 선물 받은 거라 특별히 아끼는 패션 소품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완성된 내 모습을 거울로 최종 확인한 뒤, 흡족해하며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먼저 준비를 마치고 현관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내가 혐오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자기야, 선글라스 벗어.”

“왜? 연예인 같고 멋있지 않아?”

“응, 전혀 안 멋있어. 내가 극혐하는 연예인 패션이야. 1절만 해야지 지금 2절, 3절까지 하고 있잖아!”


아내가 말하는 1절은 비니, 2절은 수염, 그리고 3절은 선글라스였다.



내가 상상하는 내 모습 (사진: 브래드 피트)


베를린에는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초강력 락다운이 세 달 째 이어지고 있다. 마트, 약국, 은행, 병원, 주유소 같은 필수 업종을 제외한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필수업종이라고 생각되는 미용실조차도 문을 닫았다. 덕분에 내 머리카락도 역대 최장 길이를 경신했다. 수염도 역대 최장 길이를 경신했다. 하필 턱과 입 주변에 여드름이 나서 일주일이 넘도록 면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머리도 긴데 수염까지 기니까, 내 모습이 상남자 같아서 맘에 들었다. 결혼 후 3년 동안 한결같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말해주던 아내가 얼마 전 나를 보고 추노(推奴)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신나서 말했다.


“추노 멋있지 않아? 장혁 멋있잖아.”

“그건 장혁이니까 그렇지!”


아무튼 비니, 수염, 선글라스 셋 중에 나는 선글라스를 포기했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 아내에게는 혐오스러울 수 있다니. 미의 기준은 참 주관적이다. 아내가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나는 이런 논쟁에 있어서 항상 아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온갖 패션이 난무하는 베를린에서도 나는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조금 억울하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잘 보이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했다.


아내는 요즘 내 수염을 볼 때마다 제발 면도 좀 하면 안 되냐고 보챈다. 면도를 하기 전까지는 뽀뽀도 금지란다. 수염이 너무 따가워서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이 쳐진다나. 결국 나는 '아내의 사랑'과 '내 수염'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수염을 길러볼까 싶어서, 아내에게 미용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수염을 기르겠다고 했다. 결국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었다. 수염아 더 무럭무럭 자라라. 2주 후면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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