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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Nov 05. 2021

검은색 코트 연가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됩니다

나는 검은색 코트가 싫다. 그래서 검은색 코트를 입고 홀연히 등장하는 영희도 싫다. 

영희는 무슨 옷을 입어도 근사했다. 보통 근사한 게 아니라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근사했다. 세상의 그 어떤 장인도 성취할 수 없는 세련미는 영희는 타고나서 뭘 입어도 태가 났다. 간단히 입으면 발랄하고, 차려 입으면 눈이 부셨다. 그런 영희가 검은색 코트를 입은 행색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심장이 뭉개지는 심정이었다. 그 모습이 차라리 수수하기라도 했으면 그저 서운하고 말았겠지만, 마냥 초라해서 분통이 터졌다. 나는 영희가 입는 코트라면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나 앤 드뮐미스터 혹은 질 샌더, 준지의 코트쯤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앞의 영희가 입은 코트에는 특징은 고사하고 아무런 의미와 목적조차도 없었다. 영희는 너무 호졸근했다. 왜 영희는 하필이면 변변찮은 검은색 코트를 입어야 했을까.

겨울 코트는 까다롭고, 검은색 겨울 코트는 너무 흔하다. 겨울에 만만한 게 검은색 코트다. 그 안에 뭘 입어도 검은색 코트만 걸치면 스타일은 전체적으로 튀지 않고 평평해진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도 검은색 코트다. 장식 없는 검은색 코트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검은색 코트로 스타일에 승부를 보기란 트로이 성을 정복하는 것만큼 까다롭다. 게다가, 애초에 쉽지 않은 코트 중에서도 검은색 겨울 코트가 가장 쉽지 않은 건 바로 코트 특유의 품질 때문이다. 쉽게 말해, 코트는 의복 중에서 가장 싸구려 티가 날 가능성이 높다. 질이 좋지 않은 검은색 코트는 보푸라기부터 시작해 구김이 그대로 남은 가장자리, 고르지 않은 빛깔 등 문제가 다분하다. 반대로 말하면 코트의 품질이 좋으면 그만큼 티가 난다. 철철 도는 윤기 하며 탄성이 있는 꼿꼿한 피륙 하며 온종일 쓰다듬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질감까지 좋은 코트는 그 자체로 빛이 난다. 따라서 나는 겨울 코트가 무섭고, 검은색 겨울 코트가 싫다. 검은색 겨울 코트는 사람을 드러내고, 잔인하다.

예쁘지도 않고, 이렇다 할 디자인도 없고, 고급지지도 않은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은 영희는 너무 초라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고 또 사랑에 관해 질문하는 영희는 눈 밑이 새빨갛고 얼굴에 생기라곤 없었다. 영희가 가는 곳곳마다 추웠고, 영희는 그때마다 검은색 겨울 코트의 허리를 끈으로 둘러서 코트를 꽁꽁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 겨울 코트는 겨울 바람을 막아 주기엔 무리로 보였다. 어차피 다 버리고 떠날 거라면 따뜻하게라도 입지. 매가리 없는 영희는 너무 추워 보였다. 나는 냉큼 달려가 옷을 바꿔주고 싶었다. 호피 무늬 퍼 자켓을 입고 스쿠터를 타고 나타나서 무심하게 남의 마음을 휘어잡던 그녀, 전위적인 무스탕을 입고도 과하지 않았던 그녀, 단정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코트를 입어도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던 그녀에게 도대체 저 상황에서 어떤 옷을 줘야 할까. 안 어울리는 옷이 있겠냐만은 마땅한 옷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검은색 롱 패딩은 너무 둔탁하고, 검은색 퍼는 조촐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 시원하게, 검은색에서 벗어나 보면 어떨까 고려해 보려고 하지만, 시야가 트이긴커녕 시야가 아예 없어지는 기분이다. 어쩔 수 없이 영희는 거슬거슬하고 까라진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영희에게 남아있는 건 다름아닌 통속의 풍파와 몰인정의 냉기에 까맣게 문드러진 온전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저 검은색 겨울 코트가 영희 그 자체다. 

코트의 디자인이나 품질이 어쨌든 검은색 겨울 코트는 검은색 겨울 코트여서, 신호등에 그 대열이 좌르륵 서 있는 모습은 꽤 흔하다. 간소한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은 영희가 그 속에 서 있다면 나는 아마 영희의 특별함을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아마 영희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 안에 청바지를 입든 펜슬 스커트를 입든 스웨터를 입든 간에 겉옷은 꼭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은 사람들 틈으로 영희도 섞여서 저 자신도 속에 저마다의 것들을 품은 보통의 사람임을 명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랑이 뭐길래 왜 사람은 온갖 고통과 진통을 감내해야 할까. 그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 그깟 것 하나 버리질 못하고 끙끙댈까. 그 사랑이 뭐가 좋아서, 받은 사랑 앞에서 사랑하려고 뒤돌았을까. 영희가 사랑한 사람은 꽤 비겁하고, 그런 사람을 사랑한 영희를 두고 사람들은 힘껏 쑥덕댄다. 그런 영희를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진다. 그럼에도 영희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상처받고도 사랑을 놓지 못하는 미련한 영희를 사랑한다.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은 영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자 같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뒤로하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영희는 돌올하다. 맹렬한 바다 앞에, 고요한 숲 속에서, 투명한 산천초목 안에서도 영희는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어서 함께 한 편의 수묵화가 된다. 그 자태는 세속의 것이 아니며, 속세에 얽매이지 않는다. 추운지 꼰 양 팔을 풀지 못하는 영희는 양지 바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다. 모든 것을 체념한 영희가 딱 하나 체념하지 않은 건 솔직하게 사는 거다. 모든 것 앞에 초연해도 솔직해지는 것 앞에서도 늘 정직하다. 세간으로부터 손가락질하는 사랑을 제 입으로 말하기를 피하지 않고, 본인을 은근히 쪼는 선배 앞에서도 턱을 들고, 저 가는 곳에 아무도 없어도 두려워 않는다. 그런 영희가 입는 옷은 유명한 브랜드의 질 좋은 코트나, 화려한 퍼, 튼튼한 패딩이 아니며, 영희는 그런 옷들이 더 이상 필요 없다. 매만지거나, 덧붙이거나, 부풀리는 것 없이 본질 자체에 가치를 둔다. 영희에게 더는 근사하니, 세련되니 따위 수식할 수 없지만, 대신 영희는 이제 몬존하다. 부차적인 것에서 떠나 그저 사랑하는 행위, 사랑이라는 순수를 중시하며, 그로 인해 본인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신음하고 앓으면서도 직면한다. 영희가 처연하지만 처량해 보이지 않는 건 바람을 막아주지도 않는 부실하고 허름한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었기 때문이다. 변명하지 않고, 허세 부리지 않고, 꾸미지도 않고 그저 진솔하고 홀가분하게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사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인간이 뭐 그렇게 잘났다고 영희는 바람에 보풀이 일어도, 햇빛에 색이 바래도,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어도 아랑곳 않는다. 그냥 그러니까 그럴 뿐, 다가오는 모든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초월한다.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은 쓸쓸하고 추운 영희가 ‘왜 사랑을 하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너무 많은 걸 고민하고 껴안고 있는 나로서는 할말이 없다. 그래서 만약 나도 그때 다른 옷이 아니라 그저 형편없는 검은색 겨울 코트를 입고 있었다면, 우아한 패딩이나 예쁜 호피 무늬 퍼와 비싸고 좋은 코트를 입고 싶어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보고 싶다’ 정도,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내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는지 궁금했다’ 정도는 고백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거지 같은 허영과 죽일 놈의 꿈, 그리고 솔직하지 못했던 마음이 원망스럽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다짐해보고 싶다’는 영희는 아무 옷이나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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