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
선생님,
건반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니
정말 놀라운 세계를 발견해요. 이렇게까지 섬약한 줄 몰랐어요.
지그시 누르느냐, 살살 누르느냐, 재빨리 누르다 떼 버리느냐,
슬며시 누르느냐, 부드럽게 스치듯 누르느냐에 따라
소리가 확연하게 달라져요. 참 신기해요.
곡 자체의 큰 세계도 좋지만,
건반 하나 음정 하나에서 탄생되는 조그마한 세계도
참 세심하고 몽환적이고 아리따워요.
그 하나하나의 세계를 감각하고 나면 곡을 끝내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그 속에 최대한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요.
한 곡의 연주를 끝냈을 때 ‘완곡完曲’하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제 경우에는 ‘느릿느릿하면서도 정성스럽다’라는 뜻의
‘완곡(緩曲)하다’가 되겠죠.
선생님, 그러고 보면 행복이나 의미 따위는
큰 덩어리가 아니라 그에 새겨진 세세한 결일지도 몰라요.
이러한 편지를 쓰는
나의 피아노 연주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eerouri/149
<둥글게 둥글게>
-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 마지막 편지
- 샴페인 잔에 담은 우유
- 천 냥 빛
- 하농
- My Life but B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