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이 90호 This is My Seoul 편 기고 글 (2018년)
꿈을 이루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
그러나 서울에는 꿈이 이뤄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한국인은 ‘서울 꿈’을 꾼다.
마치 골드 러시를 낳은 캘리포니아 드림처럼.
나도 한때 서울을 동경했다. 사실 어느 한국인이 안 그러겠는가.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어도, 한 국인이 한평생 살면서 이루고 싶은 꿈 중 하나는 서울로 가는 거라고 확신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을 꿈꾸니 말 다했다고 본다. 서울은 꿈에 관해서라면 필요조건이 되어버렸다. 서울에 가면 뭐든 할 수 있다. 아니, 서울에 ‘가야’ 뭐든 할 수 있다. 세종시가 생겼지만 청와대와 국회는 서울에 있고, 괜찮은 커피와 비건 샐러드를 먹으려면 한남동 일대에 가야 하고, 보고 싶은 전시회는 서울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다른 도시들을 무시하 는 게 아니다. 다만 한국의 주요 변화나 큰 알맹이는 서울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자신의 꿈으로 큰 물결을 일으키고 싶으면 서울에 가야 한다.
21세기가 되고 난 후, 서울은 뉴욕이나 파리처럼 고유명사이자 상징이 되어버렸다. 서울에 대한 ‘찬가’도 있다. 그러나 본질이 다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들은 파리를 향한 끊임없 는 찬사를 보낸다. 영화는 기실 파리에 바치는 찬양 그 자체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번엔 뉴욕 에 대해 말해 볼까. 미사여구 따위 필요 없이 ‘웰컴 투 뉴욕(노래 Welcome To New York 가사 중 (中))’ 한 문장으로 모든 게 다 설명될 정도이다. 심지어 뉴욕에서 이루면 어딜 가도 다 이룰 수 있으며(노래 New York, New York 가사 중(中)) 뉴욕에서는 할 수 없는 게 없다(노래Empire State Of Mind 가사 중(中))는 노랫말은 전세계인들의 열정을 유혹한다. 물론 모든 사물이 양날의 검인 것처럼 이 두 도시에도 당연히 안 좋은 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파리와 뉴욕에 관한 칭송이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탄생되고 재생산되는 걸 보면, 아직 파리는 사랑할 수 있는 곳이고 뉴욕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인가 보다. 가능성이 잠결이 아닌 현실이 되는 곳은 사람들을 자신 의 자리에서도 움직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서울은 꿈을 이루기 위한 필요 조건일뿐 충분 조건은 아니다. 서울은 꿈을 응원한다기 보 다는 살아남기에 대한 순위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열의와 희망을 갖고 서울에 가지 만 어느 순간 나가떨어진다. 그래서 서울에 관한 노래는 쓸쓸하다. 아니, 슬프다. 서울을 친구의 이름처럼 몇 번이고 불러보지만 가볍지 않은 정서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형체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가 쉬지 않고 들어오고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 끝에는 항상 누군가의 감정이 버림받아 있다. 이게 바로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본 서울의 모습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며 대견해 보인다. 저 속도와 빛, 미세먼지를 견뎌 낸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서울의 모습인가요? 지금의 서울은 누구의 책임이죠? 서울은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요? 서울은 당신의 도시인가요?
이상 저온 현상으로 봄이라는 계절에 겨울 코트를 입어야 했던 그 날 나는 서울에 있었다. 앞으 로의 미래가 막막했던 그 당시의 나는 기대를 안고 서울에 왔다가 된통 혼났다. 이대로 돌아가기 에 차비가 아까워서 궁에 들렸다. 손은 이미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졌지만 오기가 들어서 카메라 를 굳이 꺼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사진을 확인하고 정리했다. ‘움직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사 진이라는 게 동영상처럼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이 사진들을 보자니 묘하게도 움직임이 보 였다. 내가 살 서울이 이랬으면 싶었다. 정적 속 움직임. 동시에 마음을 움직이는 묵직함. 스스로 가 찍은 사진에 감동받았다는 게 우습지만, 나는 비로소 젖은 옷처럼 무거워진 마음을 친구에게 고백하고 그 다음날 다시 묵묵히 내 갈길 갔다. 그날 서울은 나에게 낭패감을 선사하고 원동력을 심어주었다. 이 사진들은 홀리 고라이틀리가 자신의 아파트 창문에서 ‘문 리버’를 부른 것의 의미처럼 나에게 남았다.
꿈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위험부담이 있는 도시, 서울. 그러나 서울에 가야 한다. 나도 ‘서울 꿈’을 꾼다. 한편으로는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설렘보다 피로가 섞인 한숨 이 나온다.
도대체 사는 게 뭐길래.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생각까지 한다.
서울아, 너는 내 도시가 되어줄 수 있니.
2018년 여름에 씀
(이후 아무 수정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