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닥다리 에디 Feb 02. 2019

폭로(暴露)

그때 난 그저 한 마리의 연약한 영양 새끼였었다. "아, 물론 지금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요 차장님, 제가 그 회사로 입사했던 그 당시 말이에요. 2010년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중앙에 앉아 계셨던 회장님 양 옆에 차장님 두 분이 계셨어요. 영업팀장님 한 분이 왼쪽에 계셨고, 재무팀장님이셨던 차장님이 우측이 계셨던 걸로 기억해요. 기억도 나지 않는 정신없는 면접시간이 끝난 며칠 뒤, 입사가 확정이 되었지요.

첫 입사였던 만큼 얼마나 떨렸겠어요. 제 바로 윗 사수가 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님 따님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여자분이 사수셨던 터라 야근 강요나 회식 강요가 없으셨어요. 다 제 복이려니 생각했었죠. 차장님과 회식자리를 갖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사수가 강요 않던 회식을 차장님은 그 뒤로부터 무던히도 강요하셨어요. 자재과와의 관계가 좋아야 하니 자재과랑 함께 회식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거나, 재무를 담당하고 있는 당신 자신과도 같이 술을 마셔야 또 회사생활이 편한 것 아니겠냐고 말씀하시곤 하셨지요. 정작 자재과 직원들조차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훨씬 지나 알게 된 사실이었지요.


'마흔이 지난 유부남들은 왜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길 싫어하는가'에 대해 논문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때 당시 말이에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무조건 회식이었지요, 짧은 회식도 아닌 한 번 술을 마셨다 하면 10시, 11시까지 마시는 날들이 많았어요. 한동안 취한 채 집으로 퇴근하기 일쑤였지요. 야근이 없고 술 마시며 노는 회식으로 인함이니 얼마나 행복한 거냐,라고 하셨지요. 그 자리에서 피에로처럼 당신 말에 맞장구치며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지만 재미와 행복은 적어도 그 자리엔 없었던 걸 당신은 몰랐을까요. 

일주일에 세 번의 회식, 나머지 퇴근시간 이후가 제 자유였더라면 제가 이렇게 울분을 토해낼 일도 없었겠죠. 총 다섯 번의 근무요일 중 세 번을 뺀 나머지 이 틀 정도의 시간에 저희가 뭘 했는지, 잘 아시지요? 취미에도 없던 자전거를 사서 한강변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지요. 다 건강에 좋은 취미 아니겠냐 하시면서 강요를 하셨잖아요. 제가 길치며 방향치였던 덕에 잠실에서 성산대교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였는지 전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퇴근 후 성산대교까지 다녀온 후에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를 넘긴 시간이더라고요. 물론, 재미는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에요.


2년에 걸친 대동소이한 시간들 후에 회사가 도산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전. 도망치지 않고 합법적으로 이 아수라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가장 먼저 사표를 냈던 걸로 기억해요. 회장님과의 잠시 잠깐 면담을 끝낸 후 마치 그 회사에 없었던 듯 모두와의 연락을 끊었지요. 퇴사 후 몇 년 간 드문드문 저에게 연락하셨던 거, 네, 일부러 피했어요. 마주하고 싶지도, 결코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시절이 생각이 나요. 결코 좋았던 추억이라서가 아니에요. 왜 그때의 나는 당당하게 '안됩니다!'라고 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후회 때문이에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내가 이처럼 연약한 영양 새끼와도 같구나, 그때의 기억을 통해 저의 무력감을 느끼곤 해요. 지금도 여전히 말이에요. 결국 저에게 아주 좋은 기억을 선물해 주신 셈이지요. 


지금은 다니시던 회사를 나오셨다고까지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었어요. 유감입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지금 저와 차장님이 처한 상황을 비교하고 대비시키며 우쭐거리거나 차장님을 욕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아마 차장님은 당시에도 자신이 얼마나 무자비한 정신적 폭력과 강압을 한 신입사원에게 휘둘렀는지 잘 모를 테니까 말이에요. 비단 그 희생자가 저만이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다만 차장님으로부터 한 가지 배우기로 했어요.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자에 대한 타산지석으로 말이에요.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나의 호의와 배려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거든요, 차장님으로부터 말이에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 조금이라도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그건 차장님과의 일이 제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거라고 믿어요. 면전에 말할 기회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라도 그간 꾹꾹 눌러 담아온 얘기를 전합니다.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작가의 이전글 성수연방, 그리고 아크앤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