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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Nov 20. 2019

나는 가끔 혼자 밥을 먹는ㄷr...☆

본디 밥을 먹는 행위 자체는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즐거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 한 켠에서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오늘 점심, 뭐 먹지?' 혼잡한 출근길에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삶은 이미 강퍅할 대로 강팍해진 것이 분명하다. 시급한 반성과 조속한 변화가 필요한 사람일 테니, 이러한 경우라면 필시 논외로 쳐야 할 게다. 요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 먹는 행위에서 크나 큰 즐거움과 만족, 그리고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먹는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난 그것을 '함께 먹는 이'라고 정의하려 한다. '함께 먹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음식이 더 맛깔나게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눈 앞의 진수성찬이 그 '함께 먹는 이'로 인해 흡사 돌가루 씹어먹는 자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이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내색하진 못해도 매일 같이 이런 경험을 하고 있을지도.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한 내 입장에선 이 '함께 먹는 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느낄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다양한 '족속'들과의 식사를 경험한 덕분이었다. 이제야 감사라도 해야 할까.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라며 얼빠진 표정으로 김영철에게 되묻는 '달콤한 인생' 속 주인공 이병헌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나 역시 되묻고 싶기 때문이다. 대신 이병헌처럼 근사하게 묻기보단 멱살이라도 슬며시 쥐어보게 되지 않을까. 당시엔 이보다 더 높아 보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다 늙은 아저씨 들일 테니 말이다.


사실 그대로를 가감 없이 이야기하자면, 점심시간마다 나를 비롯한 부서원들 모두는 주 5일 중에 3일을 중국집으로 향해야 했고, 나머지 하루는 칼국수집, 그리고 남은 단 하루만 일반 백반집을 갈 수 있었다. 게다가 한 번에 몇 개의 부서들이 모두 함께 밥을 먹어야 했던 터라 메뉴의 통일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원치도 않는 메뉴를, 단지 빠르게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문해야 했고 혹여라도 다른 메뉴를 시킬라치면 늦게 나올지라도 다른 사람과 동시에 식사를 마쳐야만 하는 파이팅과 각오가 필요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직원들의 얼굴이 우거지상인 대신 중국집 사장님의 만면에는 늘 미소가 가득했다. 깍듯하게 '손님'이라고는 불렀지만 메뉴 받을 때면 사장님만 끄적이곤 했던 그 메모지에 '호구'라고 적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분위기라 혼자 먹던, 누군가와 함께 먹던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점심시간 시작 5분 전에라도 미리 다른 팀원들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형식이다. 그러나 관성의 법칙 때문인지 난 대부분의 점심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곤 한다. 메뉴 선정부터 몹시 자유롭고 먹을 때 역시 나보다 천천히 먹는 이들이 많기에 속도에 열을 올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온전히 음식 그 자체에 집중하긴 쉽지 않다. 이따금 면을 먹을 땐 몹시 요란하게 후루룩 먹고 싶기도 하고, 뜨끈한 탕을 먹을 땐 여느 아저씨처럼 '시원하다!'를 일갈하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그래서 이따금 난 동료들 있는 채팅창에 '따(로)점(심)'을 나지막이 쓴 뒤 조용히 사라지곤 한다.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서 말이다.

이 곳은 정말이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앞서가던 (모르는) 일행이 '뷔페'를 먹으러 간다며 우르르 점심 먹으러 가던 걸 보고 나 역시 호기심에 뒤를 밟아 따라간 것이 그 계기였다. 건물 앞에 당도해서 올려다보니 '웨딩홀'이라는 팻말이 적혀있었다. 이 곳은 일반 결혼 웨딩홀에서 평일 수익을 내보고자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만 한시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회장은 무척 넓었고, 반면 사람들은 적었다. 사람 붐비는 식당을 싫어하는 내겐 최적의 환경인 셈이었다. 역시나 웨딩홀이기 때문에 청결하고도 깔끔한 공간이기도 하고, 더 맘에 들었던 건 어디선가 은은하게 90년대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제법 들을 줄 아는 주방장이 아닌가.' 음식을 맛보기도 전부터 이미 난 이 공간의 평가에 대한 객관성을 잃어버렸다.


일단 뷔페라는 점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내가 직접 선택해서 원하는 만큼 골라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이 곳 강남땅에서 얼마나 장점이 되는지, 아마 강남에서 밥 좀 먹어봤다는 사람은 알 수 있으리라. 식당마다 제공하는 밥 한 공기를 받아 그 뚜껑을 열어보면 정말이지 탄식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 머슴들이 먹곤 했다던 고봉밥까진 애당초 바라지도 않지만, 백 번 양보해도 이 양은 결코 '한 공기'가 되지 못한다. 반 공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을 정도의 밥이 담겨 있어 식당에서 말하는 '한 공기'를 먹었음에도 식사 후에 그리 배가 부르지가 않다. 점심을 많이 먹으면 당연스레 졸음이 쏟아지기에 그것을 미리 알고 배려한 식당 사장님들의 결연한 담합이라도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교롭게 이 일대의 식당들은 하나같이 한 공기 밥의 양이 대동소이하다. '직장인들의 졸음을 우리가 미연에 방지하십시다!' 식당 내 어딘가 팻말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된다.


게다가 이 곳엔 늘 국수가 구비되어 있어, 밥은 물론이거니와 국수 역시 언제건 즐길 수 있다. 한 켠엔 신선한 샐러드 역시 비치해 놓았기에 각종 소스 뿌려가며 즐길 수 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나만의 고봉밥과 샐러드, 그리고 각종 찬을 담아와 (나만의 지정) 좌석에 착석한다. 그리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곤 경건한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스피커에선 조성모의 '아시나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지만 이 큰 공간에는 나를 포함해 몇몇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도 나를 의식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덕분에 '후루룩' 소리를 내며 과시하듯 국수 면발을 흡입할 수도 있고, 뜨끈한 국을 마신 뒤 연배 있는 아저씨처럼 '시원하다!'를 읊조릴 수도 있다. 싫어하는 나물은 애당초 담지도 않을 수 있을뿐더러 정말 좋아하는 반찬이 나왔을 땐 꿀밤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그 반찬만 왕창 담기도 할 수 있다. '거, 뒷사람 생각도 좀 합시다.' 라며 눈치 줄 뒷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전 온라인 상에서 한창 이슈가 되었던 '황교익' 씨의 발언 중에 '혼밥은 자폐'라는 대목이 있었다. 세간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떡볶이에 대한 그의 말이나 글들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가 혼밥을 비하하는 듯한 그 발언엔 괜스레 나 또한 분개해했던 기억이 있다. 오로지 음식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신성한 시간이 왠지 모독당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자야말로 관계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지도 몰라', '혼자 밥을 먹다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했을지도' 따위와 같은 마음으로 지금은 그 자를 용서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처음 몸 담았던 그 회사의 점심시간으로 그 자를 밀어 넣고 싶은 마음 가득했다. 불편한 사람 즐비한 그 식사자리에서 '함께 먹어주어 감사한 마음' 따위는 누구에게든 허락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혼밥은 내겐 평화요 안락한 쉼이자 안식 그 자체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전쟁과도 같은 평일, 잠시 잠깐 허락된 온전한 쉼이라고 난 생각한다. 마치 온전한 한 공기인 양 호시탐탐 나 같은 직장인들 코 베어갈 궁리 온통인 삭막한 강남땅에서 유일하게 고봉밥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자폐라고 규정한다면, 그 사전적 의미를 '현실과의 살아있는 접촉의 상실'이라고 한다면 난 내게 허락된 그 점심시간 동안이나마 기꺼이 그리고 과감히 그 현실과의 접촉을 끊으련다.


나를 비롯해서 각자의 신성한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을 직장인들의 혼밥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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