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책들이, 또 많은 이들이 퇴사에 대해 말을 한다. 퇴사를 꿈꾼다. 덕분에 별다른 불만 없이 회사 잘 다니고 있는 내가 마치 패배자 같고 변절자 같다고 더러 느낀다. 꿈을 찾아 나간다고 하지만, 그 꿈이 밥이라도 먹여주는 걸까. 꿈을 좇는 것이 꼭 내 밥벌이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되려 난 그 꿈을 포기하는 편에 서겠다고 평소 생각해온 터다. 누군가는 회사를 지켜야 하지 않겠냐며. 그러던 중 회사 동료 한 명이 곧 퇴사한다며 소식을 전해왔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퇴사를 고민한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직하시는 거예요? 축하드릴 일인가요?"
"아니요, 그냥 그만두는 겁니다. 이직은 생각도 한 적 없어요."
"네? 그럼 왜 그만두시는..."
"세계 여행을 가야 해서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맞나? 이 친구가 뭐라고 했지? 무슨 여행? 여행사에 취직하고 싶다는 얘긴가? 아니면 농담을 한 건가?
"세계 여행을 가야 해서 그만두는 거예요."
"아, 그래요?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여행을 허락하신 와이프 분도 대단하시네요."
내가 알고 있기로 그는 결혼한 지 2년 남짓 되었고 여느 맞벌이 부부처럼 그의 부인 역시 일을 하고 있는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대단하다 할 수밖에, 세상 어느 와이프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세게 여행 간다는 남편의 결정에 동의할까. 그러나 그의 말은 첩첩산중,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만 여행 가는 게 아니라, 와이프도 함께 갑니다. 이번 세계 여행이요."
1년 남짓 이 곳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회사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하루 8시간씩 1년 동안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말이다. 개개인의 성격과 몇 가지 사소한 개인정보들, 삶의 모양과 취미 등, 시간에 비례해 알게 된다. 아니 알 수밖에 없다.
그와는 업무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들을 수 있었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 재치 있는 농담들, 구김살 없고 스스럼없는 태도들을 통해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건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의 주위엔 늘 사람들이 몰리곤 했다. 퇴근 후 그는 유독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던 걸로 기억한다. 친한 형과 따르는 동생들 많던, 늘 사람 좋은 웃음으로 기억되는, 그는 호인이었다.
그런 그가 조만간 퇴사를 한다고 하니,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이 첫 번째였고, 그 이후의 촘촘하고도 장대한 계획에 대한 호기심이 두 번째로 든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나의 예상을 비껴가도 한참을 비껴갔다. 여행사로의 이직도 아니고, 세계여행이라니. 그것도 와이프 역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부부 동반으로 함께 간다니 말이다.
그가 날 때부터 금수저라거나, 혹은 저축해 둔 어마어마한 돈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갚아야 할 적지 않은 대출금이 여전히 있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난 그의 세계여행에 사실 납득할 수 없었다. 나의 납득이 필요한 세계여행이 아님을 아주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의 염려를 줄여 줄 그의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랬는지도, 그에게 바보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느냐고, 무모한 건 아니냐며 말이다.
"그냥,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갈 것 같았어요. 이대로 대출금 갚고 하다 보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거든요. 어차피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고 믿어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걱정들 하고 살았지만, 결국 잘 흘러왔거든요. 앞으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걱정하기보다 하고 싶은 걸 최대한 해보려고요."
그때 그가 내뱉었던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적고 싶어 그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자마자 허둥지둥 메모장에 적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운 기분이랄까. 나이로는 나보다 동생이지만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는 나보다 더 성숙하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게 저런 말을 했던 그라면, 세계여행을 가야만 한다고 나 역시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 세계 여행을 가는 데 자격증 따위 필요 없지만 만약 그런 자격증이 있다면 그는 필경 따고도 남았으리라. 그에겐 하고 싶은 걸 관철시킬만한 용기가, 지금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놓을 줄 아는 겸허함이, 장차 일을 걱정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바빠서요."
"현실적으로 좀 힘들죠."
"저라고 그러고 싶겠습니까."
"다들 그러고 살잖아요."
우리 모두는 사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느라 바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대화 후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린 스스로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 해도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다. 그것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처럼, 그 가치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마치 손에 있는 걸 놓았다가는 엄청난 곤궁함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사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그것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것을 우린 은연중에 놓치고 있진 않을까. 더 큰 기회를, 더 큰 가능성을, 진짜 우리가 열망하고 바라던 그 무언가를 말이다.
그와 같이, 우리 모두 직장을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떠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린 젊어서부터 너무 앞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한번 스스로에게 자문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나 스스로가 이미 젊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더러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반문하고 싶다. 당신에겐 꿈이 있느냐고. 꿈이 있는 한 우린 여전히 청춘이라는 점에서 나의 청춘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동료의 퇴사를 통해 나 역시 조금은 달라진 시선으로 나 스스로와 대면하고자 한다. "시간이 있다면, ", "여유가 된다면."이라는 전제로 한 번 심사숙고하는 시간 갖기를 권면해 본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이다. 그 뒤에 시간과 여유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건 어떨까.
꿈을 좇는 삶은, 그 과정이 비록 조금은 더 고단할지라도 즐겁고 행복하지 않을까. 마치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나의 동료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더 궁금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여행을 마친 뒤 돌아오는 1년 뒤, 그에게 다시금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