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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닥다리 에디 Jan 30. 2020

우린 늘 누군가의 마법 속에 살고 있다.

[서평]'가끔 너를 생각해'를 통해 생각해 보는 일상 속 마법의 모양

요 근래 책태기가 슬슬 오던 차였다. 추리소설을 통해 몇 번의 위기를 극복해온 터라 추리소설을 염두에 뒀건만 이미 그 약효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추리소설에도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손에 집히게 된 책이 바로 이 '가끔 너를 생각해'가 되었다.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을 예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던 터이기도 했고, 제대로 된 판타지 소설 역시 그 재미로 치면 왠 간한 소설보다 진하다는 걸 알기에 나름의 기대를 걸어보게 됐다.


주인공 '호조 시즈쿠'는 언뜻 평범한 여대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금 시대의 마지막 마녀라고.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소타'가 갑자기 그녀의 삶에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녀라는 업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던 그녀였지만 소타가 등장하며 그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전에 세상을 관조하던 냉소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마녀로서 사람들을 도우며 세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역시 따뜻해져 간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란다. 마도구를 쓰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이 있는 한 다들 마법사야. 마음은 때때로 마법을 능가하지.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이야. 마음이 행복을 느낄 때, 그 사람 주변에는 행복의 꽃이 피어난단다. 그건 무척이나 멋진 일이지. 사람은 모두가 누군가의 마법사야. 시즈쿠도 분명히 마법사를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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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너를 생각해 中>


친구 소타와 함께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마법으로 그들의 고민을 해결한다는 설정이지만, 그렇다고 그 마법이 그야말로 영화에 나올 법한 것들이 아니라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할 용기가 없어 마법의 힘을 빌려달라는 의뢰에서부터 아파서 입원해 있는 여동생과 다시 사이좋은 남매가 되고 싶다는 오빠의 요청 등, 우리네 삶 어디에서든 누구나 경험하고 있을 법한 고민들을 주인공 '시즈쿠'는 마법의 힘으로 해결해 나간다. 요는, 우리 인생 속 고민과 문제들이 누구에게나 힘겹고 넘기 힘든 산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마법의 힘없인 해결하기 힘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은, 실은 마법 같은 것 없이도 우리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작가가 말하는 듯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마법사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마법사인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서 행복해지면 행복의 꽃이 피어난다. 그 꽃을 받은 사람이 또 누군가를 도와주면 행복해지고, 또다시 꽃이 핀다. 그렇게 점점 만발하는 꽃들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거라면…… 할머니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겠다. 마녀로 태어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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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너를 생각해 中>


결국 우리 삶 속에서 마법이란, 당연히 생각해서 쉽게 흘려 넘기게 되는 소소한 감사거리들 그 자체가 아닐까. 너무나도 소소해서 별 것 아닌 듯 지나쳐버리곤 하지만, 실은 별 것 아닌 일들이 아닌 그런 일들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발견하길 바란다. 널리고 널린 감사한 일들을. 나 또한 이 전에는 미처 몰랐다. 실은 누군가의 마법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 말이다.




돈의 가치를 잘 모르던 어린 시절, 가치를 알았던 몇 안 되는 것들은 모두 먹을 것과 연관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 앞 떡볶이, 특별한 날 먹을 수 있었던 중국집 자장면, 이따금 먹을 수 있었던 치킨까지. 어린이가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환장하곤 했던 것들은 공교롭게 모두 원초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언제나 뚝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떡볶이를 간절히 원할 때나 자장면이나 치킨을 이따금 원할 때, 그럴 때마다 그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그저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식구(食口) : 한 집에서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들


식사를 할 때마다 우리 가족은 늘 함께였다. 자장면을 시킬 때는 자장면 세 그릇에 군만두는 서비스, 치킨을 시킬 때면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생선을 먹을 땐 세 마리. 누군가 그런 생각할지 모르겠다. '식구가 세 명이구나'. 그러나 소소한 반전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버지, 어머니, 한 살 위의 형과 나. 우리 가족은 이렇게 네 식구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당연하게 주어지던 것이 실은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를 생각한 적 있었다. 부끄럽게도 성인이 되고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온 가족이 치킨을 먹는데 치킨 한 마리가 충분하다는 사실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던 차였다. 얼마 전 들어간 대학교에선 친구들 두, 세 명과 먹어도 부족한 치킨 한 마리가 우리 집에선 부족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와 형은 늘 배부른 식사를 즐기곤 했기 때문이다.

자장면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대중가요 속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우리 어머니는 자장면이 너무 달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장면이 너무 달아 싫다시던 어머니는 나와 형이 다 먹은 자장면 양념에 밥을 비벼 드시곤 했다. 거의 남지 않은 양념이라 밥을 비벼도 밥에 양념이 양껏 묻지 않았다. 그렇구나. 어머니는 단 것을 싫어하시는구나, 그저 멍청한 생각밖에 하지 못했더랬다 나는. 생선을 먹을 때도, 피자를 먹을 때도. 나와 형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떠난 뒤에도 늘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식탁에 남아 계셨다. 그렇구나. 단지, 그렇구나.


내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 양보와 사랑으로 인함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의 송구스러움을 여전히 난 잊지 못한다. 다섯 덩이의 빵과 두 마리 생선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셨다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실은 매일같이 내 삶 속에 일어났던 셈인데 난 그저 몰랐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던 것인지, 혹은 내심 마음 깊은 곳에선 알면서도 모른 채 한 건지 나조차도 모호하다. 분명한 건 난 불효자였다는 사실, 아닐까.


과거 해리포터, 혹은 요 근래 인기 있는 어벤저스를 비롯해서 마법과 관련된 책과 영화들이 우리 삶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현실 속에서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바라는 우리의 동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아니 우린 실은 모두 마법 안에 살고 있는 셈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희생과 양보라는 마법, 무한한 사랑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일들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소소한 일상들 중 어머니로부터 굉장히 당연스레 받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어쩌면 찾고 있었을지도 모를 마법 같은 순간들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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